처음 3세기에 걸쳐 일어난 박해 가운데서 남녀노소할것 없이 무수한 교인들이 희생되었다. 벌써 네로의 박해때「아주 큰 무리」가 희생되었고, 디오클레시아누스때는 이집트에서만도 만명이나 희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아직 그 숫자를 대략적으로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으로써 순교자가 되었고, 그래서 일찍부터 교회와 신도들의 공경의 대상이 되었다. 스미르나의 신자들은(156) 그분의「보석이나 금보다도 더 귀한」유골을 모아 적당한 곳에 모셔 놓은「우리는 거기에 모여 그분의 순교생일을 기념하게 될것이라」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순교자 공경에 대한 최초의 증언이다.
순교자 공경은 이미「묵시록」에서 예견된 것이었다. 요한 사도는 무수한 사람들이 하느님 앞에 서있는 것을 보았다. 알고보니 그들은 큰 환난을 이겨내고 자신들을 어린양의 피로써 희게 만든 순교자들이었다 (7, 9ㆍ14). 그렇다 교회에서 일찍부터 순교자를 공경하여 그들에게 하늘의 영광을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함으로써 곧장 하느님 앞으로 올라갔음을 굳게 믿은 때문이었다.
순교자들의 영웅적 용기는 다행히도 많은 것이 당시의 재판기록, 순교자 자신의 수기, 목격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교훈적인 의도에서 순교자들의 형벌과 고문이 과장되고 전설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고문과 사형
순교자들에게 더욱 가혹하고 더욱 오랜 고통을 줌으로써 그들로부터 배교를 얻어내고자 갖은 형벌과 고문이 동원되었다. 한두가지 예만 들면, 살점을 도려내기 위한 쇠갈고리 같은것이 그러했고 특히 불고문으로 펄펄 끓는 송진이나 불에 녹인 납덩어리 등이 사용되었다.
사형의 종류로, 노예들에게는 십자가형, 시민권이 있는 사람에게는 참수형, 그밖의 사람들에게는 화형이나 원형극장형이 선고되었다. 원형극장형이란 로마의 콜로세움 같은데서 맹수에게 잡아먹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광산으로 끌려가 종신 징역살이를 해야 했고 또 비좁고 더럽고 어둠침침한 감방에서 몇년씩 옥살이를 하다가 기아와 취위로 죽어간 사람들도 많았다.
저명한 순교자들
네로때(54~68) 순교한 베드로와 바오로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으므로 여기서는 다시 되풀이 하지않겠다.
트라야누스때(98~117)의 저명한 순교자로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냐시오를 들지 않을수 없다.
그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잡혀 로마로 이송되었다. 그때 로마교회의 신도들이 8순의 백발주교를 맞이하고 그를 따라 콜로세움까지 같이 갔다. 그는 신자들이 그를 위해 교섭을 하려하자『사자의 먹이가 되어 하느님 앞에 갈수 있게 내버려 두시오』하고 간청했다. 이어 그는 사자들 앞으로 나아가 용감히 순교했다(112년경).
안토니우스 때(138~161)의 유명한 순교자는 역시 뽈리까르뽀이다. 그는 일찌기 요한 사도의 제자였고 또 스미르나의 주교였다. 한때 신자들의 권고에 못이겨 피신했었으나 곧 밀고되어 체포되었다. 화형 선고를 받고 스미르나의 원형극장으로 끌려갔다. 형집행관이 그의 고령을 고려해서 지금이라도 그리스도를 모독하면 놓아주겠다고 하자 뽈리까르뽀는『나는 그분을 86년 동안 섬기면서 해를 입은 일이 한번도 없는데 어찌 어떻게 그분을 모욕할수 있단 말이요』하며 배교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고는 침착하게 장작더미로 올라가 순교를 마쳤다(156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때(193~211) 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서 희생된 두 젊은 여성의 순교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로마의 귀족 출신인 22세의 뻬르뻬뚜아는 예비교우로 붙잡혀 감옥에서 영세를 했다. 그녀에게 어린 자식과 늙은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녀는 그 어린 것을 보이며 눈물로 배교를 호소하는 아버지의 유혹마저 용감히 뿌리쳤다.
한편 뻬르뻬뚜아와 같이 체포된 그 집의 노예였던 펠리치따스는 잡힐때 임신중이었다. 산고(産苦)로 신음하는 모습을 보고 간수가『지금도 그렇게 아픈데 어떻게 앞으로 맹수 앞에 나서겠는가』하고 묻자 그녀는『지금은 내가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그때는 내 안에서 또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고통을 받아줄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그를 위해 고통을 당하고 있기때문입니다』고 대답했다. 다행히도 펠리치따스는 사형 직전에 딸을 낳았다. 그러고는 뻬르뻬뚜아와 함께 카르타고의 원형극장에서 순교를 마쳤다(202년).
발레리아누스 때(253~260)의 순교자 중, 특히 식스토 2세 교황과 라우렌시오를 위시한 4명의 부제가 카타콤바에서 잡혀 끌려나와 참수되었다(258). 로마의 지하묘소인 카타콤바는 신성불가침의 장소였기 때문에 신자들이 피신처로 또는 전례집전 장소로 즐겨 이용했었다. 그래서 발레리아누스는 카타콤바의 출입마저 금지시켰다(257). 이와같은 박해시기의 숱한 사연을 안고 있는 카타콤바는 16세기에 다시 발견되어 각광을 받게 되었다.
이밖에도 저명한 순교자로 블랑디나를 위시한 리옹의 순교자를(177), 철학자 유스티노(165년경), 치프리아노 주교(185), 아녜스 등을 들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녜스는 가장 사랑을 받는 순교자의 하나이지만 13세의 미모의 소녀로 사창가로 끌려갔다가 참수되었다는 등, 그녀의 전기에는 적지않은 전설이 가미되어 있다.
2세기말에서 3세기 초에 걸쳐 활약한 유명한 교회저술가인 떼르뚤리아노는 박해자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얼마든지 우리를 괴롭히고 고문하고 처형해라.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수는 더욱 불어날것이다. 사실 순교자의 피는 신자들의 씨이다.』
실제로 순교자들의 피의 증거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신성(神性)을 입증하는 감동의 힘을 발휘하여 개종의 가장 효과적인 동인이 되었다.
3백년경 로마제국의 인구는 약5천만이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벌써 약 8백만이 그리스도교 신자였다. 복음화는 서방보다 동방이, 지방보다 도시가 빨랐다. 특히 지방이나 시골은 아직 이교도가 많았다. 서양어의「시골 사람」(Paganus)이 동시에 이교임을 가리키게된 것도 사실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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