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필자가 살고있는 수도원 정원 한구석에는 몇그루 장미가 심어져있다.
공해에 찌든 탓인지 여름내내 빛바랜 조화 같은 꽃이 끊임없이 피었다 시들었지만 그 누구의 눈길도 끌지 못한채 지금은 앙상한 가지를 드러내 놓고 겨울을 기다리고 서 있다. 오늘 아침 잠시 정원에 나갔다가 나는 그 마른가지 가상자리에 한송이 담홍빛 꽃봉오리가 맺혀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찾아 오는 이 마지막 계절, 그 싱싱하던 잎사귀를 다떨쳐버리고, 뭇나무들이 동면의 계절을 향해 성장의 빗장을 가로지르는 이 시기에 저토록 어린 꽃망울을 피워 올린, 저 여린 생명과의 만남은 나에게 참으로 안스러운 생명의 애절함을 일깨우고 있었다. 차디 찬 서릿발이 내리리라는 계절의 섭리도 아랑곳 하지않고 저 뜨거운 생명으로 움터나는 한송이 꽃앞에서 나는 까닭모를 설레임으로 생명의 신비 앞에 숙연해질수 밖에 없었다.
「한그루 나무는 말한다 : 나는 종말의 그날까지 내 씨앗에 담긴 생명의 신비를 말하리라」고 헤르만 헷세는 노래했다. 과연 생명의 원초적법칙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나무야말로 가장 의미깊은 삶의 상징이 될수 있을것이다.
심겨진 그 자리에서 한 생애를 마치면서도 주어진 환경에 투쟁과 적응을 통하여 끝없는 성장을 위해 주어지는 자연의 천혜로 열린 삶을 살아가는 나무, 성실한 기다림 속에서 끝까지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저 생명에의 찬미, 그것은 끝없이「깨어있음」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아니한가. 고대 바빌론의 식물의 신(神)「아부」가 커다란 눈을 지닌 사람으로 조성되었듯이「깨어 있음」으로만 생명은 생명일수 있을 것이다.
■둘 : 한그루 나무가 우리에게 말해주듯이 우리들의 삶도「깨어 있음」으로 인하여 비로소 그 삶은 의미를 지닌 삶이 될수 있을것이다.
마르코 복음 13장에 언급되는 종말의 예언과 권고의 설교말씀은「그 때가 어제인지 모르니 조심해서 항상 깨어 있으라」(33절)는 이 하나의 메시지를 향하여 그 촛점이 모아지고 있다.
살아 숨쉬는 일체의 것이 그러하듯이 우리들의 삶도「죽음」이라는 대전제 앞에서 그 마지막 때를 향하여 있으니 종말을 생각하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 의식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인간이 살아온 그 어느 시대에도 그랬지만 절망의 먹구름이 뒤덮인 시대일수록 종말사상이 유행되었던 것은 사실이다. 2천년전 그리스도교 교회사가 그랬듯이 삼국시대 이후 우리나라 불교에서도 종말사상에 근거한「미륵신앙」이 유행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해(苦海)라고 할수 있는 이 세사의 삶, 억압받고 고통받는 민중은 언제나 고통과 수탈이 없는 이상 세계를 동경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민중의 종교심을 근거로하여 소박한 민중의 신앙을 악용하고, 그들을 우롱해 왔던 신흥종교는 하나도 예외없이 이러한 종말신앙을 강조하여 헌금과 헌납을 강조하였고 민중의 삶을 탈취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긴박하고 급박한「종말의 위기」를 강조하여 미래를 향해 오늘의 현실을 완전히 외면하도록 유도해 왔던 거짓 예언자와 거짓 메시아의 출현을 나자렛 예수는 훤히 내다 보셨음을 우리는 복음서를 통해서 알수 있다.
■셋 : 인류의 역사에 종말이 오리라는 것은 나자렛 예수의 불변의 정언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그 종말은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보복이 아니라 악의 세력안에 시련받는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위대한「하느님의 자비」가 완전히 드러남이요, 악의 세력에 대한 하느님의 궁극적인 승리가 바로 예수가 말씀하신 종말임을 마르코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종말을 앞두고 하느님의 백성이 취해야 할 삶의 태도에 대하여 복음서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가 마태오 복음 13장에 언급되는 종말현상을 글자 그대로 이해한다던가 종말의 일정표로 이해 한다는 것은 부질없고 어리석은 일이 될것이다.
종말의 구체적 시기를 두고 시한부 종말을 선언하는 것은 인간의 자기 한계를 넘어서는 어리석은 교만이요, 종교적 사기극이 아닐수 없다. 하느님 아버지 이외에는 그 아무도「그때」를 알수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나자렛 예수의 말씀이다(32절). 「불확정한 시기」는 우리에게 임박한 종말의 위기감을 고조시키게에 충분하지만 이긴장에 흥분 되지 말고「항상께어 있음」(53절)으로써 이 종말의 예언은 우리에게 절망적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불안이 아니라 오히려 언젠가 다시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예시된「기쁨과 희망의 메시지」라고 할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깨어 있음」이란 예수의 말씀에 믿음을 두고, 지금 이순간 이 삶의 현장에서 그 말씀을 살아 가도록 노력하라는 뜻일 것이다.
인간의 관습적인 범주를 따라 성령의 활동을 가로막는 종교적 형식주의를 과감히 탈피하고 봉사를 위한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경계하여, 무료한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미래를 향하여 현실을 외면하는 종교적 환상, 맹신과 광신에 현혹되지 않고「하느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삶이 바로 깨어있는 삶이 될것이다. 심판과 단죄의 두려움을 뛰여넘는 믿음의 세계에서 기쁨과 희망에 찬 기다림으로, 인류역사의 완성이요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교회 공동체의 삶은 깨어있는 삶이 될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삶은 이 세상에서「이웃사랑」이라는 구체적 삶을 통해서만 체현될수 있을 것이다.
■넷 : 1990년대는 그 서두에서부터 가공할만한 걸프전쟁을 치루면서 종말임박 신앙은 세계적 현상으로 고개를 들었지만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그현상은 가히 심각할만 하다고할것이다. 「1992년 10월」이라는 너무나 구체적 시한부 종말론으로 삶에 찌들고 억압당한 민중의 삶의 뿌리를 흔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이다. 70년대 이후 이 땅에 이루어진 경제발전, 그것은 서구화를 선진화로 보고 물질문명의 진보에 대한 맹목적 낙관주의로 선진화 환상은 수천년 내려온 문화유산을 내동댕이 치고 마침내 배금주의, 성장제일주의, 속도제일주의 앞에 이땅에 우리는 가히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세기말적 종말현상앞에 망연자실 한 채 발을 굴리며 있다고 할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성취한 문명 안에서 우리 자신을 상실해 가고 있으며, 이땅의 그리스도인들도 이러한 발전의 미명 아래 하느님의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품위를 고수하고 그 한계를 조절할수 있는 양심과 책임을 상실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의지」는 멸망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정적 종말은 이미 우리 가운데와 있다.
그리고 십자가에 처형되었던 나자렛 예수를 통해 완성될「하느님의 나라」역시 지금 우리 가운데 와 있다. 오직「깨어 있는 삶」사랑의 깨달음을 통해 얻은 시력으로써 만이「참됨과 거짓」「하느님의 뜻」과「인간의 뜻」을 구별해 낼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깨어 있다면, 눈보라가 휘몰아 칠 계절앞에서도 꽃망울을 피워 올리는 저 뜨락의 장미와도 같이 내일 이세상에 종말이 닥쳐 올 지라도 두려움 없이 우리 그리스도인은 오늘「우리의 책임」을 다할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우리 앞에 절망은 희망으로, 죽음은 생명으로 변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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