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막절 설교에서 예수께서는 유대아인을 아브라함의 참된 후예가 아니며, 하느님의 자녀도 아니고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 8,21~47). 이에 맞서 그들은 예수를 사생아로 몰아 붙였고(요한8,41) 사마리아인이라고 모함하였고 마귀들렸다고 비난하였다.
『당신은 사마리아 사람이며 마귀들린 사람이오. 우리 말이 틀렸소?』이 두가지 비난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마귀들렸다는 비난에 대해서만 대답 하셨다. 사마리아인들은 혼혈의 잡종트기들로서 이교도들의 풍습과 종교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였고 이스라엘의 정통종교생활에서 벗어난 변절족속들로 간주되어 유대아인들은 그들을 경멸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교도들과 마찬가지로 마귀와 접하여 신의 능력을 지녔다고 떠들기도 하였다(사도8, 9~24). 그러므로 유대아인들이 예수를 비난한 것은 마귀들린 이단자란 뜻이었다. 그들이 예수를 마귀들렸다고 몰아붙인 일은 여러번 복음서에 언급된다(요한7, 20: 8, 48. 52: 10, 20: 마르꼬3, 22).. 그들은 마귀들렸다는 말로써 「아무것도 아닌 자가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찾는다」라는 뜻으로 말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마귀와 죄를 연결시켰고 하느님과 영광을 연결시켰다. 그래서 『너희중에 누가 나더러 죄있다고 증명할 수 있느냐』고(요한8, 46) 말씀하셨고 당신은 언제나 하느님께로부터 온자로 말하고 행동할뿐이며 그것은 곧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하셨다. 당신의 영광은 하느님의 정해주실 것인데 그 영광은 세상사람들에게는 가리워져 있는 영광으로(요한2,11) 하느님 아버지께서 점지하시는 영광이다.
구약성서에서는 하느님의 영광이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불과 연기로, 구름속에 자연의 이변속에, 또는 하늘에 나타났다. 이제 예수께서 받으실 영광은 고통속에 나타나실 것이다.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 때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점지하실때이다. 그 때에는 「아들이 영광을 받는 때」이며 (요한12, 23: 13, 31 : 17, 1) 그 때를 점지하시는 것은 곧 하느님의 세상에 대한 심판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 가서는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으로 멸망할 것이며 믿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겠기 때문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진리를 변론하는 사람을 드높이시고 거짓의 자식들을 단죄하실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듯이 아버지께서는 예수의 영광을 도모하실 것이다.
그래서 『내 말을 잘 간직하고 지키는 사람은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또다시 강조하셨다(요한5,24:6, 40ㆍ47:11, 25:14, 21:15,20:, 6: 요한 I서 2,5). 예수께서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을 잘 새기고 지키신 (순종하신)것 같이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근원의 기를 열어주신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세상사람들이 물들어 있는 죄를 삭아없어지게 하는 해독제이다. 이 말씀을 들은 유대아인들은 에수를 마법을 써서 신적인 권위와 영광을 추구하는 사마리아 마법사로 생각하였는가 아니면 예수의 진의를 깨닫고도 끝까지 감정적인 적개심을 나타냈는가. 하여튼 그들은 또 반격으로 나왔다. 『아브라함도 죽고 예언자들은 다 죽었는데 당신말을 듣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고 하니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확실히 마귀들린 사람이군요. 그래서 당신이 아브라함이나 예언자보다는 더 훌륭하단 말이요』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너를 죽일터이니 어디 영원히 살아 봐라』라는 빈정댐을 나타냈고 그들의 손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을 방조하는 운명의 장난을 저지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복음서적인 아이로니이기도 하다. 그들이 결정적으로 실수한 것은 자기들이 멸시하려고 하는 예수를 그들의 위대한 조상 아브라함과 대조시킨 일이다.
예수께서는 적대자들이 다가서는 광경을 보시면서 다가올 결정적인 운명의 날을 실감있게 느끼고 계셨다. 그것은 죽음의 날이지만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죽음이기에 영광의 날이기도 하다. 그 영광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으로(요한1, 14) 그분의 외아들로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말하고 행하고 행동하신다. 그뜻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알리는 일이다.
그런데 예수의 대화자들은 지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면서 생활은 그분을 반대하고 있다. 예수께서 전도여행을 시작할때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께 이 우물을 준 야곱보다도 훌륭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요한4, 12) 그때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것이다』라고 하셨다. 그 여자는 예수를 알아보지는 못하였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이제 유대아인들은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예수를 반대하고 있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번영된 민족은 어느 특정 민족이 아니다. 하느님 손길이 닿는 모든 사람이 한 민족을 이룰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날을 기다렸고 과연 첫 아들 이사악을 보면서 장차 올 메시아의 날을 내다보며 기뻐하였다.
이 대목은 요한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신 복된 날이 예수에게서 이루이졌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마태오복음서(12, 17)와 루가 복음서에서도 (10, 24)같은 뜻으로 해석하였다. 많은 에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보려고 하였고, 지금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다. 아브라함의 기쁨(창세 17, 17 : 웃음=기쁨)과 그 아내 사라의 기쁨(창세 22, 6)이 오늘 예수의 날에서 이루어진 것을 사도들은 가르쳤다.
예수께서 『아브라함이 있기전에 나는 있다』라고 하신것은 당신이 하느님의 이름(나는 있다)을 지녔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신 것이고 그들이 50세도 못된 젊은 친구가 감히 아브라함과 견주느냐는 말은 그들의 마지막 강변이다. 세속적으로 생각하는 그들과 영원한 구세사적입장에서 말씀하시는 예수와는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신성모독이라 하여(레위 24, 16) 돌을 집어들었고(후에 또 돌을 집는다 : 요한 10, 31)예수께서는 그들을 피해 가셨다. 이 피신은 잠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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