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말하는 초대교회란 사도시대로부터 3세기에 이른 기간의 교회를 말한다. 이 시기에 교회의 특징이 제도와 학문, 전례와 성사, 규율과 관습 등에서 부각되면서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 교회 구조의 전체상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고대교회는 그후 교회가 개혁을 시도할 때마다 개혁의 원형(原型)이 되었으므로 그 올바른 이해가 대단히 중요하다.
교계제도와 교도권 행사
교회는 처음부터 교계제도로 시작되었다. 교황, 주교, 사제, 부제는 이미 사도시대에 기원한 것이고, 3세기부터는 차부제 소품자(小品者) 등 하급 성지계급도 생겼다. 로마주교인 교황은 아직 특별한 명칭도 없고 주교 임명 같은 특별한 권한도 행사하지 않았으나 베드로의 후계자로서의 수위권이 시대의 요구에 따라 점차 드러나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클레멘스 교황은 96년에 분규가 일어난 고린토교회에 서한을 보내 충고하고 화해를 촉구했다. 빅토리오 교황은 부활축일 날짜에 대해 교회관습을 따르도록 아시아 교회에 경고했다. 또한 교황의 특수 권위를 인정하는 표현이 교회저술가들에게서도 나타나는데, 예컨대 안티오키아의 아냐시오 주교는 로마교회가 우위에 있다는 말을 했고, 리옹의 이레네오 주교는 교회들이 사도직 정봉신앙을 유지하려면 로마교회와 일치해야 한다고 했으며 카르타고의 치프리아노 주교는 로마교회를 『교회의 뿌리요 어머니』라고 지칭했다. 한편 이단자들까지도 로마교회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했다. 이와같이 로마주교의 수위권은 주로 교회의 일치란 견지에서 표현되었다.
주교들의 사명은 주로 도시 공동체의 우두머리로서 그 일치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즉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그들에게 신도들을 지도하고 가르치고 성화(聖化)할 권한이 위임되었다. 이러한 권한은 동료 주교의 안수와 기도를 통해 부여되었다.
사제들은 주교의 자문기관으로, 성체성사 집전과 그밖의 일에 주교를 보필했다. 그러나 그들의 직무는 아직 뚜렷하지가 못했고 다음 시기에 지방에 본당이 생기면서 비로서 그 의의가 커졌다.
이미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부제들은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교회재산을 관리하는 등의 특별한 직책을 맡았다. 그들은 비록 사제들 보다 지위는 낮았을지라도 그 영향력은 그들보다 컸다. 또 그들은 사제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고 오로지 주교에게 봉사하기 위해 부제가 되었다. 사실 그들은 「주교의 귀요 입이며 마음이오 영혼」이었다.
교회를 지도하고 가르치는 교도권은 사도들에 이어 주교들에 의해 행사되었다. 교도권은 계시진리의 원전인 성서와 성전을 확정하고 주요 교리들을 신조화 했다. 그리고 이단을 막기위해 주교들은 수시로 모임을 가지고 이른바 「교회회의」 (시노두스)를 통해 공동으로 대처했다.
교회에서 인정한 성서목록, 이른바 정전(正典, Canon)이 2세기부터 위경(僞經,Apocrypha)과 구별되어 확정되기 시작했다. 또한 성서외에 성전(聖傳)이 함께 신앙의 원천이 되었다. 성전이란 복음성서가 생기기 이전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구전으로 전해진 가르침을 의미했다.
또한 교리교수용으로 「사도신경」이 작성됨으로써 대부분의 신조가 확정되어 여기에 포함되었다. 오늘에 전해지는 「사도신경」은 3세기 로마교회에서 사용한 세례 지원자들을 위한 신앙고백서였다. 그러나 핵심은 사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교회의 저술가들과 이단
이 시기의 저명한 저술가들-주로 주교-에게 「교부」(敎父)란 존칭이 붙여졌다. 교회로부터 교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신앙의 정통성 높은 성덕, 고대성(古代性), 이렇게 세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이 고대성 때문에 중세 이후는 비록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큰 학자일지라도 교부가 못되고 다만 교회학자로 불리게 되었다.
교부는 시대순으로 사도시대 교부, 호교가 교부, 신학자 교부로 구분되고, 또 그들이 사용한 언어에 따라 라틴교부와 그리스교부로 대별된다.
사도시대 교부는 사도들과 직접관련을 가졌거나 적어도 그 영향을 받은 저술가들을 가리킨다. 로마의 클레멘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포 등이 이 그룹에 속한다. 그러나 그후의 저술들, 디다케(12사도 교훈) 바르나바 서한, 헤르마스의 목자, 디오게네트 서한 등도 사도시대에 가깝다는 이유로 일반적으로 같은 그룹으로 본다. 클레멘스나 이냐시오 등이 남긴 저술은 열편의 서한 뿐이다.
다음 2세기 중엽부터 호교에 관심을 보이면서 박해자나 외교인들을 상대로 호교서를 남긴 사람들을 호교 교부라고 부른다. 철학자 유스티노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호교에 그치지 않고 교리를 좀더 신학적으로 깊이 전개한 저술가들이 말하자면 신학 교부이다 그러므로 호교 교부와 신학 교부의 구별은 그렇게 뚜렷하지가 못하다. 신학 교부로서는 이레네오, 히폴리토, 치프리아노, 호교가인 테르툴리아노와 오리제네스 등을 들 수있다.
이단은 이미 1세기 말에 체린트 같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유대계 이단이 있었지만 2세기에 들어서면서 많이 등장했다.
그노시스, 즉 「참된 인식」의 소유자로 자처한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이 이단은 실은 종교혼합주의의 산물이어서 계파도 많았다. 그러나 그들의 공통점은 우주 창조를 신(神)이 아닌 에온으로 돌리고, 그리스도를 신의 가현(假現)으로 본 점이다.
이밖에도 마니, 마르치온, 몬타누스 등이 주장한 이단이 또 있었다. 그들의 주장은 조금씩 다르지만 선신과 악신, 정신과 물질 등을 대립시킨 철저한이원론, 그결과 육체를 적대시하고 엄격한 금욕주의를 내세운점등은 비슷하다.
교회는 대외적인 박해와 함께 교회안에서 일어난 상상적인 분열을 그복해야 했다. 이 분열의 위험은 박해보다 훨씬 컸다. 그것은 대학자인 아우구스티노가 한때 마니교에, 테르툴리아노가 몬타누스설에 빠졌던 사실에서 그 일면을 엿볼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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