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 몇해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어느 시인은『오늘날 이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힘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정치지도자가 아니고, 심각한 걱정과 염려로 현실에 대한 고발만을 일삼는 몇몇 예언자들에 의해서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사랑으로 변화된 정의」를 실천하는 프란치스코 성인과 같은 사람에 의해서 이다』라고 말했다.
인격의 가장 승화된 양식으로서「이웃사랑」보다 더 고귀한 품위와 능력으로 하느님 창조사업에 동참하는 일은 없기 때문일것이다. 실로 이세상에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하는「형제적 부드러움」을 지닌「익명의 사마리아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변해 갈까. 그야말로 세상은 끝장난, 죽음의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말것이다.
■둘 : 참으로 위태로운 세기말적 벼랑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세상이 그나마 지탱되고 있는것은, 나를 포함하여 좋은 말을 수다스럽게 늘어 놓는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실로「이웃을 섬기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이순간에도 단한번 밖에 없는 자신의 생애를 바쳐, 온 세상이 철저히 외면해 버린 불쌍한 사람들을 돌보는수 많은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있고, 조직적이고 구조적인 악의 구렁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이웃을 위해 징검돌처럼 던져놓고, 숨어사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다는 것은 오늘과 같은 시대에「기적이요, 신비」가 아닐수 없다.
그 무엇 때문에,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한 형제로서의「책임」과「의무」를 통감하고, 허물어져 가는 담 같은 사람들을 부축하여 혼신의 힘을 다해 그들을 섬기는 사람들, 무력하고, 보잘것없고, 누추하여, 생의 역겨움 마저 일으키게 하는 이들을 임금님처럼, 왕처럼 모시고 사는 사람들. 가장 버림 받은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는 이들의 깨달음 안에서 살아계신 하느님은 끊임없이 새로운 창조사업을 이룩하신다 할 것이다.
■셋 : 며칠전 나는 어느 지체부자유인 수용소를 잠시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피골이 상접한 노인들의 뒤틀린 육신을 가슴에 안고, 그 몸에 묻은 배설물을 씻어내는 꽃다운 나이의 젊은 봉사자들을 만났다. 나는 그들의 그 처절한「사랑의 나눔」앞에서 속구쳐 오는 눈물을 가누며 참으로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 보았다.
하느님으로 부터 받은 믿음의 분량과 은사의 종류에 따라 자신의 소명을 살아 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사명이겠지만「저들은 어떠한 사람들이기에 저토록 영웅적인일을 할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니 그들앞에 내 삶과 믿음이 한없이 부끄럽고 초라하게 보였다. 그들은 나에게「믿음이 은혜라는 것과 그무엇으로도 설명 할수 없는 사랑의 신비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원 주었다. 「하느님의 일」과「사람의 일」을 근본적으로 하나로 본 나자렛 예수 안에서「이웃을 섬기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된다」는 진리를 이들 보다 더 극명하게 증거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디또 있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천대 받고 소외당하는 사람들을 임금님처럼, 왕처럼 모시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시는 것이 된다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그리스도교적 가르침이지만 가장 지나쳐 버리기 쉽고, 가장 망각하기 쉬운 진리가 아닐까. 왜냐하면 그것은 세상의 삶의 논리와는 근본적으로 그출발을 달리하기 때문일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간과 할때 우리는 나자렛 예수 안에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참 모습을 볼수 없게 되고, 마침내 그분이 가르쳐 주신 진리를 떠나게 된다고 본다.
■넷 : 이 세상에서 사람은 누구나 그 무엇을 섬기며 살고 있다. 그것은「돈」이 될수도 있고 명예와 쾌락이 될수도있을 것이다. 하자만 그가 섬기는 대상에 따라서 그가 정신적으로 속한 나라가 어딘지가 판별 된다고 본다. 이세상에서 우리는 이웃을 섬김으로써「하느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나자렛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복음서는 한결같이 그 하느님 나라의 왕으로서의 예수의 정체가 어떤 것인지를 소상히 보고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당신이 유대아인들의 왕이오?』(마르18, 33)라는 빌라도의 질문에서 부터 예수에게 드러난 그 왕의 정체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 왕의 정체는 인간의 상식을 끌없이 초월하여 믿음과 초월의 세계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게 한다. 그 왕은 영화와 명성을 누리며,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대신에 아무런 볼품도 없이 채찍을 맞으며 갖은 모욕과 경멸을 받고 있으며, 그 왕은 화려한 왕관 대신에 피묻은 가시관을 쓰고 계신다.
그리고 만세무강을 비는 백성들의 환호대신에 그를 향한 백성들의 외침은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살기 등등한 외침이요, 황금빛 왕좌대시에 그는 참혹한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신다.
유대아인들 왕(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는「말씀이 사람이 되셨다」는 요한복음사가의 주장에 가장 잔인한 파라독스가 아닐수 없다. 그러므로 그 왕은 이 세상의 왕과는 전적으로 다른 왕이다. 이 역설 속에 감추인 진리는 유대인들과 로마인들, 그리이스인들에게 검림돌이 되었고, 오늘 이 시대 우리 모두에게도 하나의 걸림돌로써 우리 일상의 문전에 놓여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이 역설속의 진리를 차지하고 나서 나자렛 예수를 향하여「왕중의 왕」(묵시17, 4)이라는 고백은 의미를 상실한 고백이 되고 말것이다.
■다섯 :『당신이 유대아인들의 왕이요?』…『그렇다면 당신은 왕이요?』(33·37절)라고 유대인들과 나자렛 예수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빌라도의 모습은 권력에 결탁하여 살아가는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닐수 없다. 유대인들의 고발이 거짓임을 꿰뚫어 보면서도자기 자신의 안보를 위해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못한 빌라도, 지극히 현실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죄스러운 인간의 모습은 예수를 죽음으로 몰아간 유대인들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진리를 저버리는 두 인간의 모습이다. 나자렛 예수를 향하여「당신은 나의 왕이요, 나의 임금이십니다」고 고백하기를 거절하는 모든 인간의 모습은 바로 이 두가지 얼굴속에 요약 되고 있다고 본다.
빌라도를 향해『누구든지 진리에 속한 사람은 내 소리를 듣습니다』(37절)라고 말씀하신 예수의 말씀은『진리가 무엇이요』(38절)라는 빌라도의 영원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리 예시하고 계신다. 그것은「예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즉「가장 버림 받은 이웃형제를 왕으로 섬기는 사람」만이 진리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그분의 가르침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예수를 처형한 백부장이『정말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었다』(루가23, 47)고 고백한 사실이 끊임없이 우리들의 일상 속에 되살아나게 되고, 유대인들을 경멸하기 위해 빌라도가 쓴「유대인들의 왕 나라렛 사람 예수」라는 죄목이 우리들의 삶위에 또 하나의 명패가 되어 빛날때 우리는 이 땅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에서 부활하신 그분을 왕으로 모시고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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