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는 교계제도의 시작과 초기 교회저술가들의 활동을 보았다. 이번에는 그밖에 이 시기의 성사와 규율, 종교와 도덕생활을 보고 고대 교회사의 전반부(30-313)이야기를 끝내려 한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시기는 사도성전(使徒聖傳)을 직접 이어받고 첫단체의 교회조직을 끝낸시기이고 또 이후 교회의 모든 개혁의 기준이 되었기 땜문에 매우 중요하다. 예켄대 최근에 미사의식이 간소화되고 손으로 성체를 받아모시는 등 일련의 전례개혁은 모두 이 시기에 근거한 것이다.
성사와 규율
사도들은 사삿집에서 종교의식을 거행했고, 박해 때는 지하묘지 같은데 숨어서 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3세기 전반기에 신도들의 저택들이 성당으로 개조되었고, 후반기에는 정식 교회 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또 교회건물이 장식되기 사작했는데, 이미 카타콤바 벽에 그려진 아름다운 벽화들은 그리스도교 미술의 기원이 되었다.
세례는 유아세례보다 성인세례가 더 자주 있었다. 세례는 부활절이나 성신강림 전야에 세번의 침례(浸禮)로 거행되었는데, 그 전에 성수 축성, 구마 의식과 함께「주의 기도」를 바치고「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해야 했다. 다음 성유를 바르고 흰옷을 주는 보조의식도 있었다. 세례자들은 그 흰옷을 8일간 입은후 벗었다. 여기서 부활 다음 주일에 사백주일로 불리게 되었다.
처음에는 즉시 세례를 주었으나 미구에 시험과 준비를 위한 기간이 요구되었다. 이것이「세례지원기」란는 것으로, 그 기간은 지방이나 상황에 따라 일정하지가 않았다. 또 2세기 부터 한때는 세례직전까지 삼위일체나 성체 같은 신비도리를 가르치지 않았던 이른바「비밀 규율」이란 제도도 있었다.
견진은 세례 직후 주교의 도유와 안수로 집전되었고, 곧이어 성체를 영해 주었다. 그래서 세례와 견진, 성체가 입문 성사로 불렸다. 이러한 뜻이 오늘날「전례헌장」에서 다시 강조되기에 이르렀으나 아직 견진성사만은 따로 집전되고 있다.
성체성사는 처음 최후의 만찬처럼 형제애의 표현인 회식(아가페)과 함께 거행되었으나 곧 분리되어 미사만 아침에 지내게 되었다. 제대는 하나만 있었고 거기서 주교가 그의 사제들과 함께 회중을 향해 공동집전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오른 손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고 성혈도 함께 영했다. 미사가 끝나면 병자를 방문하는 부제만이 아니고 신자들도 미사에 오지 못한 사람이나 자신들이 매일 영성체하기 위해 성체를 그릇에 담아 갖고 집으로 돌아 갔다. 처음에는 주일에만 미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사의 순서와 내용은 150년경 유스티노가 증언한 바에 의하면 성찬기도를 위시해서 오늘의 미사의 주요부문이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고해성사의 전신인 속죄규정은 오늘과는 매우 달랐고 또 일반적으로 훨씬 엄격했다. 이 규정은 주로 살인, 간음, 배교 따위의 소위사죄(死罪 또는 大罪)에만 적용되는데 먼저 공개고백을 해야 했다. 죄가 덜 중할 경우 사적(비밀)고백이 용인되기도 했으나 사죄(赦罪)만은 공식 속죄가 있은후에야 주어졌다. 속죄자는 다른 속죄자들과 함께 속죄복을 걸치고 단식과 기도, 고행등으로 매우 오랫동안-5년 또는 10년, 종신일 경우도 있었다-속죄와 참회를 해야했다. 그들은 영성체를 못함은 물론 미사도 예비자들처럼 예비자 미사에 밖에 참례하지 못했다. 신자공동체와의 화해를 뜻하던 사죄는 주교만이 행했고, 주교는 진정한 참회와 회심을 보인 속죄자들을 성목요일에 장엄한 사죄와 화해 의식을 통해 교회에 다시 받아들였다. 이러한 속죄규정을 둘러싸고 강온파가 대립함으로써 한때 교회안에 이교(離敎)까지 생겼다.
교회력「敎會曆」도 이 시기에 점차 형성되어 갔다.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자 벌써 사도를 때부터 안식일이 주일(주의날)로 대치되어 성사집전의 최고의 날이 되었으며 주일중에서도 부활주일이 아주 특별하게 기념되었다. 축일로서는 처음에 부활절만을 지내다가 유대인의 5순절이 성신의 파견과 교회의 탄생일로 첨가되었고, 이에 순교자들의 순교 생일이 축일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축일들의 전야(前夜·Vigilia) 그리고 주님이 잡히고 수난한 수요일과 금요일이 재와 기도와 금욕의 날이 되었다.
종교와 도덕생활
교회 안에서 위의 속죄규정에 해당되는 사람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신도들은 깨끗하고 수준높은 신앙생활을 영위했다. 그들은 형제애와 선행을 실천하면서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살아나갔다. 그래서 호교가들의 감탄과 자랑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한 형제애에 대해 테르툴리아노는 외교인들까지『보라, 그들이 서로 형제 자매로 부르며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있는가를』하며 경탄해 마지 않았다고 했다. 또 디오게네트 서한(200년경)은 신자들의 초연한 생활을, 『그들은 육체를 따르지 않으며, 지상에 있으나 실은 천상에 있다』고 생생하게 묘사했다.
뿐만 아니라 일부 엘리트들은 금욕과 관상을 통해 완덕을 추구했다. 그들은 복음의 권고를 따라 결혼과 재산을 포기하고 기도와 금욕과 선행에 전념했다. 이러한 엘리트들은 이미 교회안에서 특별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고, 예컨대 과부의 직제는 기도와 병자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3세기가 되면서 동정자들이 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초대교회라고 해서 그때의 교회를 이상화해서는 안된다. 용맹한 순교자들 못지않게 허약을 드러낸 배교자들도 많았다. 그러므로 이상적인 교회는 있을 수 없다. 밀 밭에 가라지는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윤리도 하루 아침의 사회개혁을 목표로 한것이 아니고 설교와 형제애를 통해 세상과 사회를 서서히 또 조용히 변혁시켜 나가도록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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