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교회사의 전반기가 이교제국에서의 교회사였다면 후반기는 그리스도교 제국에서의 교회사이다. 로마제국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허용한데 이어 그리스도교화되고, 교회는 국가교회가 되기에 이른다. 복음은 이제 도시에서 지방으로, 멀리 제국 밖으로까지 전파된다.
교회 안에서는 많은 교회논쟁이 일어나면서 큰 공의회와 저명한 교부들을 통해 신학이 크게 발전한다. 또 수도생활이란 새로운 제도가 탄생한다.
콘스탄티누스는 3백30년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비잔틴으로 옮기고, 그의 이름의 도시 즉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로 불렀다. 테오도시우스의 시망후 제국은 동서로, 즉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분열된다. 서로마제국은 476년 민족의 대침입으로 멸망하지만 동로마제국은 천년간 더 지속된다. 일반적으로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476년에서 고대가 끝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동방에서는 고대가 더오래 지속된다.
콘스탄티누스와 테오도시우스 대제
세계사는 이 두 황제에게 대제(大帝)란 존칭을 붙였다. 실제로 그들은 그렇게 불릴만한 업적들을 남겼다. 특히 콘스탄티누스는 세계사에 전기를 초래한 위대한 황제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306-337)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주는 동시에 박해때 몰수당한 교회재산을 반환케했다. 뿐만아니라 교회와 교인들에게 많은 특권을 부여했다. 교황들에게 민법상의 재판권을 인정했으며 성직자들을 공무 복무에서 면제시켰다고 또한 교회의 소유권과 상속권을 인정하고, 교회로 피신하는 사람들을 비호할 권한도 주었다. 또 그는 십가가형을 폐지했고 주일을 준수케했으며 교인들을 고관직으로 우대했다.
콘스탄티누스는 또한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팔레스티나에 베드로 대성전과 성묘, 성당 등 웅대한 교회건물을 짓게 했다. 특히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의 성당들은 그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를 통해 짓게 했는데, 성녀는 327년 주님의 십자가를 발견하는 수훈을 세웠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임종의 자리에서 보호소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생전에 이교를 관용했으며 잔인한 행위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개종이 진정한 것이었으냐 아니면 정치적인 책략이었느냐가 계속 문제시 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그의 개종을 의심없는 사실로 인정했다.
임종 직전에 세례를 받은 것은 당시의 관습에 불과했고 그가 이교를 금하지 않고 관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반면 그리스도교를 공공연하게 지지하고 촉진시켰다. 물론 종교의 일치로 제국의 일치를 공고히 하려는 정치적인 이유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그리스도교에 대한 황제의 적극적인 지지와 교회에 부여한 법적인 특전적 위치만으로도 교회사에 전기를 초래하기에 충분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세 아들들(337-360)은 아버지보다 이교를 더욱 강력하게 탄압했고 그 결과 그리스도교 신자수가 급증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361-363)에 이르러 그 발전이 잠시 중단되었다. 그는 그리스도교 교육을 받았으나 젊었을 적에 이교 철학자들의 영향을 받은 관계로 황제가되자 가톨릭 신앙을 배신하고(여기서 배교자란 별명이 유래한다) 이교인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제국도 이교로 복구시키고자 그리스도교인들을「갈릴래아 사람들」이라고 경멸하면서 반격을 가했다.
그는 폐쇄된 이교 신전을 다시 열고 매일같이 제물봉헌을 하게 했고, 교회학교에서 고전(古典)을 가르치는 것은 금지시켰고, 교인들을 고위 관직에서 축출하는 등 여러가지로 학대했다. 이리하여 비비안나같은 순교자들이 다시 피를 흘리게 되었다. 배교자 율리아누스는 예수의 예언이 거짓임을 입증하고자 예루살렘 성전까지 재건하려 했다. 마침내 그는 임종 직전에『갈릴래아인들아, 결국 너희가 이겼다』는 말을 하고 죽었다.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사실은 옳은 말이었다.
테오도시우스 대제(375-395)에 이르러 그리스도교는 유일한 공인된 종교로 인정되고(380)이에 사실상의 국교가 됨으로써 제국(국가)교회로서의 기반이 완전히 잡히게 되었다. 그는 이교를 결정적으로 금지하고, 이교 신전은 폐쇄 하거나 파괴시켰으며 이교로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을 형벌로 다스렸다. 또 그는 아리아니즘을 근절시키기 위해 니체아 신경을 의무화하고 새로 공의회를 소집했다(381)이로써 동방에서는 이교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국가교회의 문제
교회는 박해받는 교회에서 특권의 교회로, 순교자의 교회에서 국가교회로 전환하면서 완전히 새로운국면에 처하게 되었다. 그것이 국가의 그리스도교화였든, 교회의 속화였든 어쨌든 간에 국가와 교회 모두에게 많은 이점과 큰 위험을 함께 안겨 주었다.
국가는 그리스도교 윤리에 근거하여 노예제도, 십자가형, 검객(劍客)의 싸움 등을 폐지시킴으로써 로마법의 일부를 개혁할수 있었다.
또 교회로 보면 복음전파란 본연의 사명을 더 쉽게 이행할수 있게 되었고, 뿐더러 교회법과 교회규율의 실시가 보증되고, 나아가서는 소유권을 인정받음으로써 자선사업을 크게 전개할수 있었다.
그러나 황제가 공의회를 소집하고 교리문제에 간섭하는 등 종교문제에 자주 개입하게 되었고, 그럴위험은 점점 커져만 갔다. 한편 교회의 위험도 컸다. 박해때는 적대적인 국가에 성공적으로 저항했으나 이제 호의적인 국가에게는 어떻게 협력해야 할지를 잘 몰랐다. 집단개종은 더욱 문제였다. 순교까지 각오했던 헌신적인 엘리트시대와는 판이한 이름뿐인 신자들이 대중을 이루게 되어 교회가 평범해지고 속화될 위험이 커졌다.
여기서 우리는 소위 콘스탄티누스 전환기를 어떻게 평가해야할건인가? 쇠퇴기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과연 교회가 국가권력에 순응하며 본연의 사명을 저버렸던 것일까? 황제가 월권행위를 한것일까? 그 판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당시의 복잡한 시대상황과 시대적요청을 충분히 고려해야할 것이다. 요컨대 피상적이고 편파적인 비판은 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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