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과 공의회
아리아니즘 때문에 처음으로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고 또 새로 이단이 나올 때마다 잇따라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여기서는 이 시기에 개최된 4회의 공의회만을 고찰하기로 한다.
공의회에서는 문제의 그릇된 주장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파문하는 한편 정통신앙을 신경(信經)으로 확정지었다.
이단은 한때 교회에 분열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불행한 일이었으나 한편 신앙을 연구하여 심화시킨 점에서는 다행한 일이기도 했다. 공의회는 8차까지 모두 동방(비잔틴)에서 열렸으며 황제들이 소집하고 주재했다.이것은 당시 정치적으로는 물론 신학적으로도 동방이 서방보다 우세했음을 의미한다.
이 시기의 4회의 공의회중 처음 두번은 삼위일체론을 다루었고 나중 두번은 그리스도론을 다루었다.그 경과는 이러했다.
325년 니체아공의회(1차 공의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아리아니즘으로 인한 교회와 제국의 분열을 종식시키고자 보편적 교회회의(공의회)를 개최할 작정으로 제국의 모든 주교들을 니체아(소아세아)로 소집했다. 약3백명의 주교들이 참석했다. 대부분은 동방 주교들이었고 서방주교는 5명 뿐이었는데 그중에 2명의 교황사절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리우스와 그 추종자 등은 그들의 주장을 고수했으나 결국 정통신앙파가 승리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아타나시오 부제의 영향이 컸다. 마침내「성자는 성부의 아들이고 그러나 피조물이 아니고 성부와 동질(同質Consubstantialis)의 똑 같은 참된 천주」라는 니체아 신경이 확정되었다. 아리우스는 파문되고 황제에 의해 유배되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곧 변심하여 아리우스편을 들게 되자 아리우스는 복직되고, 그간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된 아타나시오는 유배되었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자 니체아 신경파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져 아파나시오는 다시 네번이나 유배되어야 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2차 공의회)
가톨릭 신앙의 절대 지지자인 테오도시우스 대제는 제국에서 아리아니즘을 근절시키고자 새로 공의회를 수도로 소집했다.
여기서 니체아 신경이 완전히 승리했고 그 결과 아리아니즘이 제국에서는 완전히 사라졌다. 이 공의회는 또한 성신의 신성(神性)을 부인한 마체도니우스를 거스려(그래서 이 이단이 마체도니아니즘으로도 불린다)「성부에게서 나와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참된 흠숭을 받는 주 성신」이라고 성신의 신성에 관한 신조를 니체아 신경에 첨가했다.이래 니체아 신경은「니체아ㆍ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불리게 되었고 그후 신자들의 신앙고백을 위해 미사경문에 도입되었다.
서방에서는 그후「성부에게서 나온자」에 「성자에게서」(Filioque)란 말이 첨가되었다. 그런데 동방에서는「성자를 통하여」(Per Filium)를 고집하며「성자에게서」를 확대 해석이 아닌 신앙의 변조로 이단시 했다.이런 견해의 차이는 그후 동방 이교가 생기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고 그차이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431년 에페소 공의회(3차 공의회)
이 공의회는 네스토리우스가 참석을 거부한 가운데 그를 파문하고 동시에 동정 마리아가 참된 천주의 모친임을 재확인했다. 마리아게게 천주의 모친 칭호가 부여되었다는 소식에 마리아 성전(현재 그 폐허가 에페소에 남아있다)밖에서 공의회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던 군중이 열광적으로 환호했다. 한편 네스토리우스는 추방되어 미구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451)
451년 칼체돈 공의회(4차 공의회)
그리스도의 단성론(單性論) 주장자들은 449년 에페소에 모여 공의회를 군대까지 동원해 강행하여 에우티케스를 지지하고 정통파들을 단죄했다. 그래서 이 교회회의는 그후 역사에서「강도회의」로 불리게 되었다. 이에 당시 교황 레오 1세는 에우티케스를 파문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파비아누스에게 유명한「교리 서한」을 보내고 그의 입장을 지지했다. 동시에 교황은 황제에게 공의회 소집을 요구했다. 이리하여 칼체돈(콘스탄티노플 교회)에서 진짜 공의회가 열리게 되었다.
약 6백명의 주교들이 참석함으로써 가장 큰 공의회가 되었고 3명의 교황사절은 우대되었다. 교부(공의회 참석중인 주교에 대한 존칭)들은 레오 교황은 교리서한에 의거하여 그리스도의「위격적 결합」(Unio hypostatica)을 「베드로가 레오를 통해 말했다. 과연 사도들의 신앙이다」고 환호하며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이 결합은 위격(位格,Person)에서의 결합이기 때문에 종래처럼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의 두 성이 혼합되지도 않고 (반단성론) 분리되지도 않음으로써 (반양성론) 각 성의 특성이 보존된 채 이루어지는 나무랄데 없는 해결이었다.
(반양성론) 각 성의 특성이 보존된 채 이루어지는 나무랄데 없는 해결이었다.
최초의 교회분열
공의회로 이단은 극복되었으나 이단자까지 극복되지는 못했다. 이단자들은 파문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을 고수하며 활동을 중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때 제국을 휩쓸지 않을까 크게 우려했던 아리우스주의는 테오도시우스 대제의 강력한 조처로 로마 제국에서는 사라질 수 있었으나 고트족, 반달족 등 새로 등장한 게르만 민족에게 널리 전파되면서 미구에 가톨릭 신앙의 가장 큰 적수가 되었다.
네스토리아니즘도 박해로 제국에서는 사라졌으나 페르시아로 가서 고유한 교회를 세웠고, 나아가서는 인도를 거쳐 중국에 까지 가서 교회를 세웠다. 네스토리아니즘은 7세기에 중국에 전파되자 경교(景敎)로 불렸는데 781년 장안(현재의 西安)에 세워진 경교비(1625년 발견)에 의하면 당시 신도가 3천명이나 되었다.
특히 단성론자들은 다음 세기에 다시 나타남으로써 다시 공의회에서 단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553년 5차공의회)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아르메니아, 아비시니아(오늘의 이디오피아) 등지로 널리 전파되어 오늘에 지속되고 있으며 신도수도 아직 1백만명을 헤아리고 있다. 이 교회는 곱트와 야곱 두파로 구성되어 있는데 곱트파는 이집트와 이디오피아에서 국가교회를 이루고 있고 야곱파는 시리아의 국가교회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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