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현장을 찾는 일은 쉽지가 않다. 그 역사가 어떤 이유로든 깊숙히 묻혀 있었다면 현장을 찾아 과거를 살펴내기란 더욱 어렵다. 중국대륙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아직은 어렵고 또 이르다는 진단 속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태동에 결정적인 뿌리가 되어준 중국대륙ㆍ중국천주교회에 취재의 문을 두드렸다. 변화의 소용돌이가 소련을 필두로 동구라파 전역을 휩쓸고 지나는 동안 소위「6ㆍ3사태」라는 이변을 자기 방식대로 치뤄낸 거대한 대륙, 중화 인민공화국은 변화라는 물줄기의 양 옆에 서서 조심스런 시도를 거듭하고 있는 듯 했다. 두 발을 모두 담글 것인가, 아니면 한발만을 담근채 계속 기다려볼 것인가…
중국의 천주교회는 바로 그런 모습을 한 중국속의「작은 중국」이었다. 6월 27일부터 7월 11일에 걸쳐 이루어진 이번 취재는 한국의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사제로 서품된「김가항(金家巷)성당」, 첫 미사를 봉헌한「횡당(橫塘)성당」, 사제수업을 받고 부제로 서품된「장춘」의 「소팔가자(小八家子)성당」, 그리고 한국 천주교회의 첫 영세자 이승훈이 세례를 받은「북당(北堂)」등등 마카오가 있는 광동땅「광주」에서부터 북한과 중국의 경계지역인「도문」,연변조선족자치주의「연길」, 백두산에 이르기까지 성 김대건 신부와 초기 한국교회 평신도들의 발자취가 서려있는 지역들을 취재 대상으로 삼았다.
중국 역사 속에 살아숨쉬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독자들과 더불어 몇차례에 걸쳐 찾아보고자 한다.
중국 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처음 배우는 단어가 있다. 바로「만만디」다. 「천천히」「느긋하게」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만만디」를 배우는 것에서부터 중국 여행은 시작되는 것 같았다. 우리라고 예외일리가 없었다.
세계 곳곳에「빨리 빨리」라는 한국말 단어를 유행(?)시키고 있는 한국사람인 우리에게「만만디」를 가르치는 것이 막중한 임무인 듯한 중국인내원에 의해 우리가 배운 첫 말 역시「만만디」였다.
나의 중국 취재여정은 중국에서 가장 개발된 도시 중의 하나인 광동성「광주」에서 시작됐다. 세계 곳곳에 1천4백만명 이상의 화교를 배출해 놓고 있는 광동은 그 화교들이 투자한「경제적 흔적」들을 곳곳에 담고 있었다.
광동성의 성도(省都) 「광주」는 근래들어 경제특구로 지정된「주하이(珠海)」, 「선전」 등의 지역과는 달리 이미 오래전부터 중국의 대외무역의 중심지였다. 따라서 크게 낯설지 않은「이국」으로 다가온 광주는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의 일부를 중국대륙에서부터 살펴보는 발판으로서 그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다. 광주가 차지하고 있는 지리적 위치로 볼 때 김대건ㆍ최양업 신부 일행이 요동ㆍ만주를 거쳐 중국대륙을 횡단, 「마카오」로의 행군에 포함된 마지막 장소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번 취재는 성 김대건 신부의 동상을 그의 발자취가 담긴 중국 땅 곳곳에 세우고자 추진해온 한국 천주교 성지연구원(원장ㆍ故 오기선 신부)의 현지방문을 동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취재여정은 광주를 기점으로「북경」ㆍ「장춘」ㆍ「도문」을 잇는 지역들과 김 신부가 귀국로를 찾기위해 무수히 드나든「상해」로 잡혀졌고 이 여정은 김 신부의 행로를 부분적으로 이어보는, 안타까운 시도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성지연구원측이 세우고자 했던 김대건 신부의 동상건립 지역은 사제서품을 받은 김가항성당을 비롯, 첫 미사장소인 횡당성당, 그리고 부제품을 받은 소팔가자성당이었다. 이들지역 외에 북경 북당은 1784년 이승훈이 조선사람으로는 처음 세례를 받은 곳으로 역시 이승훈의 동상건립이 추진됐다.
「북경」은 초기 한국 천주교회와는 각별한 관계가 계속된 장소이기도 하다. 이승훈의 영세를 기점으로 조선 천주교회와 깊은 인연을 맺은 북당은 교회성립의 필수요건인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한 장소로써 계속 부각되기 때문이다.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김범우가 순교하고 잠시 주춤했던 조선교회가 당시 윤유일 등을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파견, 성직자를 요청하자 이에 주문을 내딛게 된다.
1801년 신유대박해로 주문모 신부, 여회장 강완숙을 비롯 무수한 신자들이 순교, 조선교회는 다시 목자없는 교회로 남게된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1811년 흩어진 교회를 일으키며 교회재건운동이 일면서 당시 새로운 지도자로 활약하던 어여진이 북경에 파견된데 이어 1816년에는 정하상 바오로가 북경땅을 밝게된다.
그로부터 10여년간 북경은 정하상ㆍ유진길ㆍ조신철 등 조선 천주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들이 교회재건과 성직자영입운동을 펼치는 주 무대가 된다.
드디어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된다. 박해를 순교로 맞서며 교회를 지켜온 신자들의 피와 땀이 조선천주교회의 새로운 장을 열게한 셈이었다.
7월 1일 오전8시30분, 조신철, 유진길 등이 세례를 받았을 장소로 추정되는 북경 주교좌「남당」을 거쳐 방문한「북당」은 주일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로 다소 붐비고 있었다. 파리노틀담성당 정면을 연상시키는 북당의 한 모퉁이, 소성당에서 한국방문단의 미사가 처음으로 봉헌됐다. 조선천주교회와 북당사이에 놓인 역사적 사건들에 비추어볼 때 이날의 미사는 감격적일 수 밖에 없었다.
1985년 굳게 닫혀있던 문을 활짝 열고 새롭게 기지개를 켜기시작한「북당」은「남당」등 중국의 주요성당들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고자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활기찬 자전거의 물결 속에서, 자유롭게 상품을 사고파는 자유시장의 인파속에서 또 다른 태동의 중국을 볼 수 있다면 이들 성당들도 같은 시각으로 비추어 보는 것이 옳을 듯 했다.
오랜 잠에서 깨어난 모습답게 다소 어둔하고 느긋한 표정이었지만 그것이 곧 중국다운 특성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에는 오랜시간이 필요없었다.
과거의 역사를 들추어가며 빠른 시일내에 김대건 신부, 이승훈 등 관계자들의 동상건립을 요청하는 한국방문단의 조급함이 한ㆍ중간의 국교정상화 이후로 멀리 미뤄두는 중국측의 여유를 뚫을수 없음은 당연한지도 몰랐다.
6ㆍ3사태 발발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바로 그 현장, 천안문 주위로 지난 10년새 많은 대형건물이 들어섰다는 것이 중국안내원의 설명이었다. 중국 근대사의 상징, 천안문을 중심으로 치솟고있는 고층빌딩의 위용은 분명 변화하는 중국의 오늘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변화하면서도 그 변화가 부풀려 보이지않는 곳 역시 중국의 현재 모습이기도 했다.
북경이 초기 조선천주교회 신자들의 활동무대였다면「상해」는 김대건 신부의 확실한 연고지가 아닐수 없다. 「마카오」학업을 마친 김대건ㆍ최양업일행이 귀국길에 오르기위해 대기한 항구, 오송구가 바로「상해」에 있다. 귀국기회를 틈타며 상해에 머물던 김대건은 통역관의 자격으로 42년 8ㆍ29 체결된「남경조약」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44년「황포조약」과 더불어 남경조약 등 서구 열강들에 의해 체결된 이들 조약들은 가톨릭교회의 중국전교를 보다 확고히 다지는 계기를 이루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 가톨릭을 앞세워 중국을 식민지화 하려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전술의 한 방면이었고 오히려 이는 그리스도교 전파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어쨌든 김대건은 이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게된다.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35km 떨어진「김가항성당」에서 김대건은 폐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것이다. 한국의 첫 사제는 이렇게 탄생됐다.
김씨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성촌이었던 김가항의 성당은 60~70평 규모의 소박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김 신부의 서품식이 거행된 본래의 성당은 오래전에 파괴됐고 바로 그 장소에 세워진 현재의 성당은 세번째 건물이라고 성당관계자는 설명했다.
김가항성당 방문에 앞서 만났던 상해교구장 진노현 주교는 김가항성당의 옛 모습을 복원하는 새 성당 건립을 계획하고 있다고 밝힌데 이어 방문단이 요청한 김 신부의 동상건립 문제를 흔쾌히(?) 받아들여 우리를 놀라게 했다. 김대건 신부 동상 건립에 장애가 될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진 주교의 답변이었다.
앞서 방문했던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앞지른듯한 이 상황은 개방된 상해의 면모를 그대로 대변해 주는 듯 했다. 「횡당성당」은 김가항성당과 버스로 30여분 거리에 위치한 역시 조용하고 깨끗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김 신부가 서품 후 첫미사를 봉헌한 곳으로 알려져있는 이 성당은 고맙게도 옛 모습 그대로라는 설명이었다.
김 신부 일행이 조선입국의 항로로 선택, 수시로 드나들었던 상해는 1926년부터 32년까지 대한제국의 임시정부가 있었던 또 하나의 역사적 장소로 취재의미를 더해주었다.
「상해」에서 장춘까지는 비행기로 2시간 40분여의 거리. 상해에 앞서 찾았던「장춘」에는 김대건이 조선으로의 입국을 시도하는 가운데 택했던 동북입국로의 거점이기도 했다. 장춘에서 1시간30분 버스로 달리다보면 나타나는 마을, 소팔가자의 성당에서 김대건은 1846년 12월 부제품을 받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작은집 8개로 시작된 마을이라 소팔가자(小八家子)로 이름붙여졌다는 이곳 성당에서 8순 노령의 주임신부는 김대건 신부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가 전혀없었다. 85년에 지어졌다는 새 성당의 깨끗한 모습에서 1백50년전의 흔적을 찾아내기란 쉽지가 않았다. 이미 40여년전 이곳 소팔가자가 김 신부의 학습지이자 부제품 장소임을 확인한 바 있다는 故 오기선 신부의 안타까운 추적에도 불구, 동상건립에 필요한 확실한 고증은 얻어내지를 못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의 숙제로 남겨질 수 밖에 없었다. 「연길」에서「백두산」그리고 북한ㆍ중국의 경계지역인「도문」으로까지 이어진 이번 취재가 처음부터 안고 있었던 아쉬움은 김대건 일행이 출발한 서울을 기점으로 마카오까지 그 행로를 그대로 밟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북녘땅」을 가로질러 변문을 통과 요동과 만주를 거쳐 중국대륙을 횡단, 마카오로 이어지는 그 여정을 그대로 밟을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은 실감나는 아픔이었다.
그러나 전혀 꿈꿀 수 조차 없었던 중국 대륙으로의 길이 열렸고 그 길을 따라 시도한 김대건 신부의 행로추적은 분명, 또 다른 희망과 가능성을 시사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최근의 남북교류 추진노력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취재는 중국땅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을 건립하고자 하는 한 노사제의 강력한 집념없이는 불가능했다. 남은 생 전부를 이에 걸었던 故 오기선 신부. 중국방문단을 이끌고 현지일정을 진두지휘했던 오기선 신부의 이번 순례는 김가항성당을 방문한 후『이젠 죽어도 원이 없다』던 그의 말대로 마지막 길이 되고 말았다. 故오기선 신부 영전에 중국취재의 소고(小考)를 바치고자 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