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칭의 차이
천주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윤리신학 Moral theology라고 하는데 개신교측에서는 기독교윤리학Oh-ristian Ethics라고 하는 것이 통례다. 외형상으로 구별이 되듯 문제를 접근하고 해설하는 데 서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내용에서는 즉, mos(moris)나 ethos는 모두 습관, 관습, 도덕 등의 의미를 내포하는 단어이다. 그런데 윤리신학 발전사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윤리신학」이란 고유명사는 종교개혁 이후에 가톨릭이 사용한 것으로 그 중심이 라틴계 민족들이라 할 수 있고 개신교측은 북구와 영미의 문화권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일반 윤리학과 구별되는 그리스도교적 윤리란 의미로 이름하게 된 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그대로 우리 사회에도 영향을 주어 천주교회는 윤리신학으로, 개신교는 기독교윤리학으로 명명하게 되었다. 따라서 학문의 분야로는 통일한 것으로 보아도 무난하겠다.
가톨릭의 윤리신학
천주교회는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사목자들과 특히 고해성사와 연관되어 실제적이고 구체적 윤리생활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것은 자칫 율법주의로 오해받을 소지를 갖고 있으며 실제로 윤리생활을 지나치게 교회의 법규 중심으로 하였다. 이점이 결의론과 개연론을 더욱 발전시켰고 건실하고 능동적 생활에 별로 이익을 주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이 독립되면서 윤리신학에서는 주로 죄가 되는지 안되는지, 죄가 된다면 중죄(重罪 혹은 死罪) 인지 경죄(輕罪, 小罪)인지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프로테스탄트의 기독교 윤리학
개신교회는 중세기부터 시작된 신학의 특성을 그대로 이어왔다고 보겠다. 즉 윤리신학을 교의신학과 구분하지 않고 조직신학에서 다루며 하느님의 말씀과 인간의 응답의 구세사적 측면을 유지하고 있다. 가톨릭의 신학이 성서, 교의(敎義), 윤리, 교회법 등 과목별로 나뉘어 발전되어 온 데 비해 개신교의 신학은 성서, 조직신학(組織神學), 실천신학(實踐神學)등의 분야로 계승되어 왔으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일부 신학자들이 기독교 윤리학을 하나의 독립적 학문으로 취급하고 가톨릭에서 하였듯이 기독교 윤리학을 교재로 출간하였다.
기독교 윤리학이 강조하는 분야는 개인의 윤리보다 사회 윤리에 치중하거나 가톨릭의 계율적 윤리에 대칭(對稱)하는 성서윤리, 복음적 윤리를 호선하고 있는 경향이 크다. 전자가 결혼, 가정, 국가, 사회 등에 대한 창조 질서에 대하여 논의하는데 비하여 후자는 그리스도교적 윤리의 특성으로서 복음적 윤리, 사랑의 윤리를 강조하고 상황적 자유로운 응답에서 고유성을 찾으려고 한다.
공통점과 차이점
가, 공통점
가톨릭이든 개신교든 윤리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와「새 사람」을 기초로 하고 대상으로 하며 그 학문의 근거를 성서에서 찾고 있다.
그러므로 대상이나 근본적으로 논거의 바탕은 동일하다고 하겠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베푸신 은혜와 인간이 받은 구원과 새 생명 그리고 그 은혜로운 부르심에 대한 응답의 삶이어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서로 다를 수가 없다. 특히 제2차 바티깐 공의회 이후 교회 일치 운동과 함께 문화의 유산으로서의 분열의 아픔과 일치를 위한 노력, 공동연구 등으로 이제는 교단 내의 보수와 혁신의 차이가 종파간의 차이보다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클 수가 있다.
나, 차이점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점은 결국 종교개혁 당시로 소급되는 구원에 대한 이해와 성서의 권위와 교회관계 그리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설명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동시에 상호간의 오해의 골도 깊게 파였다.
첫째, 구원에 대한 이해: 이는 의화(義化)에 대한 설명으로 천주교회에서는 인간이 회개와 영세(領洗)로 인간이 실제로 의화(義化)되며 하느님의 뜻에 맞는 행동을 할 수 있으며 구원에 적합한 행위, 즉 공로가 되는 삶, 하느님의 뜻에 의합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에 반대해서 개신교측은 인간의 구원은「믿음으로만」이루어지는 것이며 오직 하느님만이 자비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며 인간은 늘 죄인으로 남아 있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 스스로는 죄스럽고 악을 행하는 것 외에 하느님 앞에 덕스럽고 칭찬받을 만한 행위를 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의화(義化)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인간의 믿음을 보시고 의인으로 간주하신다고 한다.
둘째, 성서에 대한 이해: 성서의 권위에 대한 문제로 개신교에서는「성서만」이 유일한 기준이고 권위이며 교회는 성서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 누구도 어떤 것도 이에 도전하거나 월권을 해서는 안된다고 설명한다. 가톨릭에서 성서는 하느님의 말씀임에 틀림이 없고 그런 의미에서 절대적 권위를 갖지만 성경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교회 안에서 보존되며 교회에 의해서 올바로 해석된다고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의 뜻은 성경과 성전(교회)에서 전수되고 전달된다고 한다.
셋째, 인간의 자유의지: 가톨릭에서는 인간이 비록 죄로 말미암아 타락했고 범죄하지만 자유가 완전히 상실된 것이 아니고 상처받았다고 표현한다. 따라서 하느님께 응답적 존재로 남아 있어 은총을 받아들이고 은총으로 말미암아 선행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개신교에서는 인간의 자유는 죄로 말미암아 상실되었으며 아무런 자유가 없어「은총으로만」구원의 길에 이르며「자연법」은 구원을 위해 무능하다고 말한다.
결론적으로 종교개혁 당시의 프로테스탄트의 3대 원칙으로 소급되며 이것이 윤리신학에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다. 즉「믿음으로만」(sola ride) 「성경 홀로」(sola scriptura) 「은총으로만」(sola gratia) 구원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권위와 자비의 은총이 조금이라도 손상되어서는 안되며 가톨릭은 이 원리와 어긋나게 자력으로 구원되고자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이며 비그리스도교적 판단이다. 아마 그렇기 때문에「가톨릭은 기독교인가」하는 개신교측의 질문도 가능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이런 호교론적 대치계보다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해하고 증거하는 데 있어 보완적이고 협력적태도를 취하는 것이 참 기독교적 윤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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