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다시말해서 신앙은 하느님의 말씀에 전 삶을 맡기는 행위이다.
이성은 인간의식의 주체
그런데 이성은 인간의식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은 인간의 지식을 분석하고 증명하고 지식을 쌓아올리는 지적능력이다.
신앙과 이성 이 양자를 구별하고자 하는 견해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신앙과 이성의 관계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학설이 있다.
1) 신앙은 이성이 필요없는 것으로 신앙절대주의적인 이론
2) 이성이 신앙을 지배한다고 하는 합리주의 실증주의 과학절대주의의 이론
3) 신앙과 이성은 모두가 일종의 인식의 기능인데 그 영역이 전연 다르며 양자는 독립적인 영역을 갖는다는 설.
4) 신앙은 인간에게 확실하고 절대적인 가치관을 부여하지만 이성은 언제나 모호하고 상대적이다라는 이론등이다.
역사적으로 신앙과 이성문제는 많은 학자들의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자연이냐? 초자연이냐? 또는 자연능력이냐? 하느님의 은총이냐? 하는 두가지 대립적인 관계속에서 논쟁이 계속되었다. 신앙이 먼저냐? 이성이 먼저냐? 하는 문제도 같은 문제이다. 쉽게 풀어보면 알기 때문에 믿느냐? 믿기때문에 아느냐? 아는 것이 먼저냐? 믿는 것이 먼저냐?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신앙은 계시진리를 긍정
이상의 문제점을 정리한다면 우선 이성은 과학적인 내용이고 신앙은 초자연적인 은총의 영역이다. 이성의 능력으로 자연의 진리를 탐구해서 지식을 쌓고 신앙은 하느님의 무한한 은총속에서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초월적인 것이다. 이성은 자연진리를 찾고 신앙은 계시 진리의 긍정이다.
양자간의 관계는 어떠한가?
중세 철학자 안셀무스(Anselm-us)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알기위해서 믿는다』(Credo ut in-telligam)안셀무스는 믿음을 지식보다 더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어려운 문제를 떠나서 우리는 먼저 믿어야 지식을 얻게된다. 예컨대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1억 5천만km라고하는데 나는 이것을 말하는 과학자의 권위를 믿기때문에 이런 지식을 습득하게 된다. 내가 직접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를 자로 재어 볼 수는 없다. 어린이가 무엇을 알게 되는 동기도 부모님의 말을 그대로 믿기때문이다.
근원적으로 우리는 이성의 능력으로 우리의 존재를 받은 것은 아니다. 다시말해서 나는 무엇을 알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세상이 무엇인지 전연 모르고 태어났다. 세상에 태어나서 적어도 10여년이 지난 다음 내가 무엇인지 세상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 알게된다. 그러므로 이성은 우리의 존재를 만든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존재의 의미를 실증적인 방법으로 설명을 할 수도 없다.
신앙은 하느님의 은총
이성은 신앙을 갖게하는데 있어서 어느정도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전적으로 이성이 신앙을 갖게하는 동인은 될 수 없다. 무식한 사람도 다시 말해서 이성이 제대로 개발되지 못한 사람도 가끔 깊은 신앙을 가질수 있다.
신앙은 근원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다. 이성은 신앙을 갖는데 있어서 「신앙의 가신성」(Credibili-tas)의 문제까지만 그 영역의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왜 믿을수 있느냐? 하는데 대한 답변만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곧 이성의 영역이다. 하느님의 절대성 그분의 권위와 위대하심을 깨달은 이성은 그분의 말씀에 승복하는 행위를 하도록 이끌어 주는 역할만을 할 수 있다.
결국은 이성의 한계점 앞에 신앙은 이성의 무능력을 보충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떼르뚤리아누스는 말했다.
『그것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그리고 철학자는 『신앙은 이성의 연장이다』또는 『사변이 끝나는 바로 거기에 비로소 신앙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인간 지식의 능력으로 답변이 없는 자신의 신비성 존재의 근원적인 목적 행복과 사랑의 궁극적인 해명 이것은 오로지 신앙만으로 답변이된다.
「죽음」이 무엇이며 죽은 다음에는 인간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과학은 침묵을 지킨다.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만이 우리에게 새로운 초월적인 지식을 갖다준다.
앎과 믿음, 조화이뤄야
이성이 참신앙을 일깨우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잘못하면 이성은 신앙의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알 수 없다는 그 한계점을 깨닫는것이 진정한 지식의 역할이 아닐수 없다.
지식으로 답변이 없는 그 한계점을 극복하는 길이 곧 신앙이다. 그러므로 신앙과 지식을 끌고 영원한 세계로 가는 것이다. 이렇게 지식과 신앙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알고싶어하고 동시에 믿고 싶어한다.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기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종교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이며 과학없는 종교는 맹목이다.
양자의 아름다운 조화속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영원성과 초월성이 그의미를 갖게된다는 말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