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펄펄 내린다.
온 세상이 솜사탕처럼 하얗게 부풀어보인다. 언덕아래 놀이터의 미끄럼틀, 그네, 정글탑…심지어 쓰레기통까지 빨기만하면 단물이 나올듯, 마치 요술나라처럼 황홀하다. 슬기는 팡팡 굴러뛰며 저도 모르게 노래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노래소리는 금새 힘없이 꼬리를 감추고 시무룩해져서 그는 대문에 기대 섰다.
지금 쯤은 엄마랑 아빠가 만났을까?』슬기는 아빠가 계신다는 감옥이라는 곳을 상상해 보았다. 아주 춥고 깜깜한 델 거라는 짐작 밖엔 안되었다. 그래서 아빠를 생각하기만 하면 슬기는 슬펐다. 엄마는 아빠가 착하기 때문에, 정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는 얘기다. 슬기의 슬픔이 조금도 덜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아빠가 함께 있지 못하다는사실, 아무리 보고 싶어도 자유롭게 만날 수 없다는 문제가 슬기를 한없이 슬프게 만들었다. 아빠는 얼마나 힘들고 불편할까… 슬기는 그만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낸다. 손등이 따가와진다. 발도 시려웠다. 빨리 엄마가 왔으면 좋겠다. 아빠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조급해 왔다. 아빠를 만나고 온 엄마의 품에서는 아빠의 체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슬기는 엄마가 아빠를 면회가는 날이면 이렇게 대문 밖에 꼬박 서서 기다리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따라 엄마는 왜 이렇게 늦어지는지 모르겠다. 손발이 어름이 배기는지 이제 더는 참을수 없게 아파왔다. 슬기는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빠도 이렇게 추우실 거야하는 생각을하자 그만 으앙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슬기는 꼭 씩씩한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잘 참아내었다.
문득 눈발 사이로 어린이 놀이터 저편에 무엇인가 움직이는 것이 있어 그는 언덕 아래로 쪼르르 내려갔다. 기다리는 엄마는 아니었다. 동네 아이들 십여명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슬기 또래도 있고 더 큰 형들도 있었다. 내리는 눈때문인지 모두들 얼굴이 해맑아져 행복해 보였다. 그들은 눈을 뭉쳐 서로 던지며 엎어지고 달아나고 한덩어리로 딩굴어지며 하늘 높이 깔깔깔 웃음소리를 날려보냈다. 슬기도 그 애들 속에 끼었다. 신나게 뛰다보니 이마에 진땀이 솟아났다. 정말 신바람 나는 눈싸움이다.
헌데 그중에 제일 큰형이 『그만』하고 소리를 쳤다.
『이러다간 오늘 세배 황새울겠다. 자,출발』제일 큰 형은 그렇게 말하고 뒷전에 쳐져있는 슬기에게로 와서 손을 잡았다.『꼬마야 너두 함께 가자, 수녀님이 널 보시면 귀여워해주실 거야』슬기는 별로 망설이지 않고 따라 나섰다.
수년원에서는 할머니 수녀님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세배를 받고 난 수녀님은 유난히 맑은 얼굴에 하나 가득 미소를 떠올리고 『세배값을 주어야할텐데…』하며 일어나 선반에서 작은 바구니를 내려 아이들 앞으로 돌렸다. 생전 처음 와 보는 곳이라 어색하게 쪼그리고 앉아있는 슬기 앞으로도 바구니는 돌아왔다.바구니 속에는 앙징맞게 접은 색색가지 작은 종이새가 소복히 담겨 있었다. 슬기는 파란색 종이새를 하나 골라잡았다. 수녀님은 장난기 어린 짖궂은 미소를 지으며 모두들 종이새의 마음을 한번 찾아보라고 말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한동안 어리둥절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종이새를 뱅뱅돌려 살피다가 무언가 깨달은듯 곧 부시럭거리며 접은 새를 풀어나갔다. 순식간에 종이새들은 해체되었다. 이제 종이새가 아니라 그저 한장의 색종이로 남았을 뿐이다. 헌데 그 색종이의 한복판에 각각 낱말이 하나씩 씌어져 있었다.「사랑」이나 「믿음」이니,「소망」등의 좋은 낱말이 여러 아이들 사이에 서너장씩 중복되어 겹쳐 나왔다. 아이들은 모두 좋아라고 환성을 올렸다. 슬기만이 맨뒤에까지 그대로 있었다. 푸는 방법을 모르기도 했지만 종이새가 하도 예뻐 그냥 갖고 싶어진 때문이다.
그런데 옆의 친구가 어서 풀어 보자고 졸랐다. 그러자 슬기의 마음도 급해졌다. 그 색종이 위에 박힌 글자를 보는 순간 슬기도 친구도 그만 입을 다물었다.「고통」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두 글자를 대하는 순간 슬기는 가슴을 빠개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그 낱말은 아빠를 연상시켰고, 아빠로 해서 늘슬프게 지내고 있는 엄마와 자기를 돌아보게 만든때문이었다. 슬기의 표정을 바라본 제일 큰 형이 가엾어하는 빛으로 누구 좀 바꿔줄 사람없냐고 모조리 물어 보았지만 헛수고였다.
마침내 수녀님은 세배값이라는 선물을 제비 뽑은 그 낱말에 따라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받은 선물의 포장을 곧바로 벗겨내어 서로 비교하며 기뻐했다. 선물은 크레파스, 색연필, 필통이었다. 그때 갑자기 수녀님의 높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자, 이제 딱 하나 남았어요, 제일 비산 세배값, 세상에서 가장 값진 거죠』수녀님은 금색 포장지로 정성껏 싼 여지껏의 품목에 비교할수 없을 만큼 크고 두터운 물품을 두손으로 받쳐 올려 보이며, 아직 아무것도 받지 못한 사람 나오라고 하였다.
슬기는 선뜻 일어서지 못했다.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로 쏠려왔다.
수녀님이 슬기쪽으로 다가오셨다.『본명이 무어지요?』슬기가 무슨 말인지 몰라 망설일새도 없었다.
아이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대답했다.『그애는 성당에 안 나와요』순간 슬기의 얼굴은 모닥불처럼 달아올랐다.
수녀님은 활짝 밝게 웃으며 슬기의 머리를 어루만져 주었다.『아, 퀴한 새손님이군』아주 기쁨에 넘친 소리로 말하고 수녀님은 슬기의 손에서 종이 쪽지를 받아 무슨 시를 낭송하듯 고운 목소리로 천천히 또박또박 잘 알 수 없는 말을 외어나갔다.『그리스도께서는 항상 고통받는 사람곁에 계십니다…』슬기는 잘 알수없지만 그뜻이 자기 가슴에 와닿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수녀님은 『하느님 말씀이 적힌 성서예요. 엄마 아빠랑 함께 두고두고 읽어요』하시며 슬기를 품에 꼭 안으셨다. 슬기는 눈물이 글썽해 졌다. 무겁게 누르던 슬픔이 구름이 걷히듯 서서히 벗겨져 나가는 듯한 편안함을 슬기는 느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