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89년 10월 5일부터 8일까지 서울에서 개최된다. 세계성체대회가 1년 10개월여 남은 이 시점에서 우리 신자들은 성체대회에 대해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을까? 성체께 대한 깨달음과 신심을 심화하고 행사후 이를 생활운동으로 연결시킨다는 성체대회의 기본 뜻을 신자대중에게 고루 파급시키는데 도움을 주기위해 본보는 성체대회준비위원회 사무처가 제공하는 교육자료를 계속 싣기로 했다. 먼저 J용만신부의 「세계성체대회의 의미」부터 소개한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교회를 가시적인 공동체로 설립하셨다. 그분은 교회를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높은 언덕위에 세워진 도시로 묘사하였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밝힌 빛이 됫박 아래 숨겨진다는 생각은 아예 버리셨다.
수세기 이전을 회상해 보면 우리는 이런 생각이 외적 풍경에서까지 현저하게 드러나는 시대를 생각하게 된다. 셀 수 없이 많은 성소가 모든 지방에 흠어져 있었고, 한편 도시는 높이 솟은 교회의 청탑이 주위의 경관을 지배하고, 성당에는 그 시대의 온갖 부와 최고의 예술품들을 간직하고 전시하였다.
이에 비하면 오늘날의 상황은 쇠퇴되어 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장의 굴뚝이 교회의 첨탑보다 더욱 높아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은행, 기차역, 극장 및 호화로운 호텔 등은 교회를 오랫동안 그들의 그늘 아래 묻어 두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자신의 모습을 사회생활 전반에 이르기까지 드러내고 보존하고 증언해 오고 있다. 교회와 교회의 여러 기관들은 여전히 우리의 가정 가운데서 그들의 복잡한 양식을 엿보게 한다. 교회의 종소리는 주일날 여전히 울리고, 또 주일은 아직도 사회생활의 리듬을 결정한다.
그리고 비록 오늘날의 교회가 기술 시대의 허다하고 거대한 기념물 아래 겨우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해도 그런대로 감명깊게 지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교회가 큰 축일을 자나거나 큰 회의를 치를 때 수십만의 신자들이 모여 어떤 도시의 대강당을 채우거나 더우기 여러 국민들이 세계성체대회를 거행하기 위해 세계의 그 어느 대도시로 모일때가 바로 그러하다.
사실 그러한 사건은 어떤 중대한 교회의 가장 성스러운 재산이요, 가장 내밀하고 깊은 실재로서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불가견적 세계가 현세와 접촉하는 것이요, 그 면전에서는 오직 경건한 침묵과 열성적 신심만을 지녀야 할 신비이다. 고대의 백성에게 조차 성전은 흠숭의 장소가 아니라 세속과 동떨어진 하나의 영지, 즉 속된것으로부터 분리된 성역으로서 가능한 한 속세의 일상사와는 별 관계가 없는 곳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성체성사에 있어서 거룩한 실제들에 대해 보다 심오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가 있으니 즉 가시적상-빵과 포도주-이 그 실재를 의미하고 거기에는 오직 신앙만으로 파악될수 있는 신비라는 문제가 있다. 오늘날 신앙이란 상처받기 쉬운 것이라 많은 현대인이 더이상 그것을 지닐수가 없고, 경험주의 시대에는 믿음이란 그 존재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라고 많은 이의 조소를 받게 되었다.
어두운 세상안의 씨앗
다른 한편 성체성사는 그것이 지닌 내밀성과 내면서으로 끊임없이 외적 세계로 향해 뻗어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어두운 땅 속에서 위로 치솟아 올라 밝은 빛 속에서 마음껏 성장하는 씨앗과 흡사하다.
우리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세상에 오실때 도래한 하느님 나라를 묘사함에 있어 성장과 자기 전개의 표징을 조리정연하게 이용하신다. 하늘나라는 이 세상이라는 밭에 뿌려진 씨앗이다. 또 하늘나라는 내부로부터 강하게 활동하는 누룩이다. 그것은 또 작아서 별희망이 엿보이지 않는 겨자씨나 마침내 한 그루나무로 자라 그 어느날엔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된다.
성체성사에 겨자씨로 상징된 실재는 가장 작은 우주로 집약된다. 여기에서 인간 가운데 오시는 하느님 아드님의 강생-신성과 인간성이 혼돈이나 나눔없이 신비롭게 결합된-이 실현된다. 그분의 오심에서 비롯되는 세상의 축성이 여기에서 새로와진다.그리스도께서는 반식은 다르지만 다시 한번 밀과 포도 같은 현세의 물질을 소재로 삼으신다. 밀은 곡물 밭에서 나고, 포도는 포도원에서 난다.
그분은 온땅을 두루다니며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밀떡과 포도주를 통해 우리를 당신 가까이 끌어당기신다.
그리고 여기에는 오직 신인의 거룩한 위격만이 아니라 그분의 활동과 수난의 구속적 신비가 현존하고 따라서 성체성사는 성부께로 돌아감이고, 성부의 뜻에 따른 그분의 속죄적 순종의 신비이며 그것으로 그분은 우리에게 영생의 길을 열어 준신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지닌 겨자씨는 바로 이 때문에 모든 점에 있어서 대낮의 밝은 빛으로 치솟고있다. 그안에서 씨앗이 지닌 어떤 신비로운 본성이 숨어있는데 그것은 주위의 땅에서 자양분을 끌어올리수 있고, 싹을 띄워 솟아오를 때 자신의 형태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성체성사는 믿는이들을 함께 불러모은다. 거기에서 우리주 그리스도의 말씀이 가장 분명하게 실현된다.
『내가 높이 들리면 나는 모든 것을 나에게로 끌어올리리라』
이것은 초대교회의 게도에 영감을 준 사상이었다.
『이 낟알들이 온 산에 흩어져 있다가 지금함께 모여 하나가 된 것처럼, 당신의 교회도 세상 종말에 함께 모여 당신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소서』
성체성사와 교회
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신비체』를 세우셨다. 수년전 유명한 신학자가 『신비체』라는 제목의 책을 냈는데 그 당시에는 별로 관심을 끌지못했다. 그 제목은 그 책이 교회에 관한 저작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또한 성체성사에 관한 저서임도 확실하다.
그 책에서 저자는 신비체라는 말마디가 최초로 그리고 수세기 동안 성체성사로 이해되었음을 밝힌다. 그 자체로 간순히 「거룩한」 「신비로운」 이란 의미를 지니는 형용사를 사용함을써 카콜링거 왕조시대의 신학자들은 성사 안에 현존하는 주님의 몸을 한편으로는 주님의 지상 생애 가간의 물리적 존재 양상과 구별하고,또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라는 주님의 몸과 구별하려고 했다.
이제 지상적인 몸, 성사적인 몸, 그리고 교회라는 이 세가지 개념에 대하여, 후자의 두 개념을 밀접히 결부시키고, 성사적인 주님의 몸을 교회안에서의 현현과 관련기켜 보려는 전통이 지난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었다. 이것은 단순히 성바오로의 사상을 따르는 것이었다.
<제공=성체대회준비 위원회사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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