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부터 새해 연초에 이르기까지 준우는 수많은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을 받았다.
멀리 외국에 나가있는 친지로부터 받은 것도 있다. 그런가하면 이틀이 멀다고, 늘상 만나다시피하여, 무엇때문에 연하장까지 보낼 필요가 있을까 싶은 가까운 친구로부터 받은 것도 있다.
이거야 도저히 먼저 연하장을 보내거나 세배를 드리러 가야만할 선배로부터 먼저 받게된 송구스러운 연하장이 있는가 하면 받아도 그만, 안받아도 그만인 상품광고의 선전문을 겸한 연하장도 수두룩했다.
그러나 아무튼 매일처럼 날아든 연하장은 쌓이고 쌓여 주체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좀더 젊어서는 날아든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을 벽면에 붙여 진열하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추리에 매달아 장식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어릿광스러워 그만두었다. 그저 책상위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아무리 주체스럽다해서 정성이 깃든 인사장을 찢어 쓰레기통에 버릴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은 아무렇게나 찢어 없애버릴수 없을 만큼 고급양장지에 아름다운 그림이나 글씨로 화려하게 인쇄되어있는 것이다.
이제 연하장이 오는것도 뜸해진 무렵이 되어 그동안 쌓아 논 연하장을 다시한번 훑어보고는 빈 박스에라도 담아 챙겨둘 작정이었다.
그러다가 전혀 뜻밖의 연하장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언제 받았던것인지 기억에 없었다. 아마도 너무 많은 연하장 속에 미처 눈에 띄지 않은 채로 쌓아 올린 갈피속에 그대로 끼어들었던 모양이다.
손수 그린 진달래 꽃의 화사한 그림엽서에다가 몇줄의 인사를 겸한 사연도 적혀 있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요즈음 저는 왜 살아가는지조차도 모르겠습니다. 모든것 마음 뿐으로 한해를 보내고 말게 되었습니다. 또 맞이한 한해, 축복의 해가 되기 원하오며 신년초엔 꼭 한번 뵙기를 원합니다. 내내 건강하시며、가내 행운 있으시길….
YㆍJㆍO드림
실로 간단한 사연이었다.
하지만 그 간단한 사연의 공간 사이사이에도 준우만이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함축이 있는듯 싶었다.
그것을 일일이 꼬집어서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런채로 더없이 반가운 것이 아닐수 없었다. 어쩌면 그많은 크리스마스 카드나 연하장 가운데 가장 반가운것의 하나였을지 모른다.
그런 연하장이 어째서 도착 즉시 눈에 띄지 않았던것일까.
그렇게까지 운명이란 거창한 말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운명이란 그처럼 장난기가 있고 짓궂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했다.
애초부터 그녀와의 인연은 잘못 짜여진 시간표 (時間表)였으니까.
하지만 왜 살아가는지조차도 모르겠다는 자조나 회의는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예술에 쏟는 정열과 몰두로 하여 다소 혼기를 놓쳐 자칫 올드ㆍ미스란 말을 듣는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발랄한 어여쁨을 지닌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규수화가이다. 그럴 좌절을 느낄 여자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준비중에 있던 개인전 (個人展)에 어떤차질이라도 있어 어떤 실의에라도 빠져있는 것일까.
더구나 그녀는 유아영세를 받은 독실한 가톨릭신자가 아닌가.
어떠한 고난이나 각고도 능히 신앙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의지의 여인이 아니었던가.
준우는 어쩌면 그 짧은 사연에서 너무 지나친 억측과 멋대로의 판단을 내린 것이 아닐까、그 예쁜 연하장을 만지면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번 만나 보자…)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뒤늦게 답장의 연하장을 보내는 것도 쑥스럽지 않은가.
전화라도 걸어줄까.
-이번에 받은 많은 연하장 가운데서 가장 반가웠던 것이 그대의 것이었어요. 오는 일요일 성당에서 함께 미사를 드리면 어떨까요? 내가 그대의 본당으로 갈까요, 아니면 우리 교회에서 만나면 어떨까요? 그것도 아니면 중간지점인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보면 어떨까요?)
민우는 전화의 다이얼을 돌리기 전에 미리 대사를 외우는가, 리허설을 하는 무대배우처럼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틀림없이 나와줄거야…)
그는 다이얼을 돌리면서 숙맥처럼 혼자 미소짓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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