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은 하나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덩어리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이니 비록 우리가 여럿이지만 모두 한몸인 것입니다』(1고린10, 17)
성 아우구스띠누스가 성체성사에 관해 언급할 때 어떠한 사상이 그를 계속 사로잡았었다.
성 바오로가 인용한 말씀을 그가 어떻게 해석하는가는 다음 인용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몸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된다. 만일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살기를 바란다면 그리스도의 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일치의 기본이 되는 성사를 찬양한다.
『오 은총의 신비여, 일치의 표지여, 사랑의 끈이여!』
아우구스띠누스는 두말할 나위없이 다른 교부들과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몸의 실재적 현존에 관해 언급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교회의 일치에 효과를 주는 창조력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의 가르침에서 성체성사는 단순히 주님의 몸과 피일 뿐 아니라 교회의 일치의 표지가 된다.
세례를 받은 신입 교우들에 대한 그의 강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만일 당신들이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분의 지체들이라면 주님의 식탁 위에 놓은 것은 또한 당신들의 신비가 된다. 그리하여 당신들은 당신 자신들의 신비를 받아모시게 된다.』
여기에서 아우구스띠누스는 이미 고대교회의 자의식 속에 뿌리박혀 있던 사상을 더욱 명백히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영성체」는 오늘날처럼 그리스도의 성사적 몸을 받아 모시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마디는 한 공동체의 지체로서 신자들의 결속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사도신경에서 우리는『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다. 오늘날 공통적으로 이해되는 것처럼 이 말마디는 성인들이 서로 공을 통한다는 한가지 의미만을 지닌다. 즉 세례로써 성화된 영혼들의 공동체인 교회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라틴교회 (희랍교회)에서 그 말마디는『거룩한 것에 의해 형성된 공동체』(성인들의=거룩한 것들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거룩한 것들에 의해 함께 모인 공동체, 즉 그 가운데서 성체성사가 첫자리를 차지하는 바 거룩한 교회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한다. 아우구스띠누스가 자기 이전 및 이후의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사용한 그 표현은 의심할 여지없이 주로 이 마지막 의미를 드러내고 있다.
성세성사는「신비체」이 고교회 또한 신비체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성체성사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신비체」라는 말마디가 바뀌어서 교회에만 배타적으로 적용된 것은 스콜라시대의 시초에만 있었던 일이다. 뚜르네의 시몬으로부터 인용한 다음 문장은 그러한 의미 변화가 이미 일어났음을 보여주고 있다.『제단의 성사에는 두가지 실재가 존재한다. 즉 그리스도의 실재적 몸과 교회이다』
이런 발전에서 나온 주목할 만한 결론은 성체성사와의 연결이 점차로 빛을 잃은 것만이 아니었다. 그뿐 아니라 형이상학적 또는 비실재적인 그 무엇 및 신비체에 의해 전달된 개념으로 사용되었던「신비체」라는 단어는 단체적인 몸의 한 종류로 암시되었기 때문에 윤리적 일치의 개념으로부터 거의 구별될수 없었다. 실재로 악마의 신비체에 관해 언급될 정도까지 사태가 진전되었으며, 반면에 교회에 적용된 신비체라는 명칭은 의미가 공허해졌고, 금세기까지 그 명칭은 실재적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고대교회는 교회인 그리스도의 몸과 관련시켜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성사적 몸을 생각하였다. 이와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그 후대의 교회는 특히 종교 개혁자들이 대두된 후 이단적인 공격에 즈음하여 성체성사를 거의 그리스도의 역사적 및 지상적인 존재 양상에만 결부시키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리하여 뜨리덴띠노 공의회에서「실재적으로, 참으로 또 실존적으로」라고 표현된 것처럼 실재 현존에 대한 교리를 납득시키려 애썼다.
근대에 이르러 이런 방향으로 진전함에 따라 우리는 오늘날 고대교회의 영적유산중 소홀했던 다른 부분을 다시 간직하게 되고 다행히도 성체성사에 대한 이해에 못지않게 교회 자체에 대한 이해를 갖는 결과를 얻고있다.
우리는 교회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이들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였으며 신자들은 그분의 지도아래 이 세상을 이기고 하늘의 삶을 얻게되며 마침내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위해 현세에서 그 길을 준비한다고 배웠다.
이제 더이상 교회에 나와서 교회의 배려를 받기만 원하지않고 그들 자신이 교회임을 깨닫고 교회의 성직자들과 함께 교회를 위한 책임을 나누어 가지려는 신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이제『교회는 인간의 영혼속에 깨어있는 것』만은 아니다. 교회는 다시 수백만 수천만인의 마음속에 새로운 힘을 불어넣으면서 살아 움직이고 있다.
한편으로 성체성사는 더욱 완전하게 이해되고 있다. 독일의 전례부흥에서 첫자리를 차지하는 것들 중 하나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체성사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하게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 원인이 무엇이고 또 그 결과 (효과)가 어떠했는지는 언급하기 어렵다. 지난 세기에 사일러와 그후임자 모흘러에 의해 매우 힘있게 이루어진 교회 개념의 쇄신은 전례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토대의 일부가 되었다.
<제공=성체대회준비위원회사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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