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상 살아온 이야기를 하자니 조금은 난감하다. 이 나이 정도면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겠느냐고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실상해줄 이야기가 별로 없는 것이 도리어 안타깝다.
이상하다고 여기겠지만 아마 개인적 성격탓이거나 다른 사제들에 비해 그다지 큰 사건을 겪지 않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래도 후배사제들과 교회를 위해 한마디 해달라고 하니 기억나는 대로 정지를 해보겠다.
나는 1897년 8월 1일 황해도 송화에서 아버지 구용수(요한·1925년에 60세로 선종)와 어머니 김병열(아다가·1951년에 78세로 선종)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다.
원래 위로 한분이 형이 있었으나 일찍 병사했기 때문에 자연히 출생과 함께 독자가 됐던 것이다.
송화를 떠나 일찍부터 장연(長淵)에서 자란 나는 후일 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여기서 성장했는데 동네사람들이라고 해봤자 11가구에 50명정도 밖에 안되는 극히 외딴 시골이었다.
농사를 짓던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밥을 굶는 정도는 아니었으며 특별히 어머니의 손재주가 각별나 동네에서 칭찬이 자자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2대째 교우인 어머니를 뒤이어 아버님께서 영세, 입교하심으로써 자연스럽게 신앙적 분위기에서 자랄수 있었던 나는 밤마다 호통불 아래 앉아 저녁기도를 바치고 했던 모습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마을 11가구가 모두 신자로써 아예 마을 이름도(道)를 익힌다(習)고 해서「도습리」로 불렀는데 모두들 주일미사는 물론 철저히 수계(守誡)에 임했다.
집안팎으로 신심이 풍요했던 덕에 후일 별 갈등없이 사제의 길에 들어설 수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외조부(김석겸·베드로)의 영향이 매우 컸었다.
한의사로서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외조부는 송화에서 살다 풍천으로 이주하면서 동네 주민들을 모두 신자로 만들고 거기에 공소까지 세울 정도로 열심이셨으며, 한문에 능해 동네 꼬마들의 훈장 노릇까지 하셨다.
특히 당시 서울교구장 민주교와 각별한 사이로 최소 1년에 한번정도는 서울로 민주교를 예방했던 외조부는 민주교의 소개로 프랑스 선교사로부터 희귀한 양약을 많이 선사받아 의술을 베풀어 본의 아니게 명의(名醫)라는 칭호를 얻기도했다.
이 외조부의 신앙은 후대에 결실을 맺어 외손자인 본인을 비롯, 외증손 김명식 신부(춘천교구 운교동본당 보좌), 친손자 김영남 신부(서울 이태원동본당 보좌)의 손자 임충신 신부(은퇴), 조카손자 박기주 신부(서울 응암동본당 주임)등 성직자 5명과 손녀중 1명을 수녀로 배출했다.
또 외조부가 전교했던 마을에서 장금구 신부(은퇴), 김피득 신부(사망)등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가 나오기도 했다.
7살때 당시 장연본당 주임 김요셉 신부(세속명은 기억이 확실치않음)로부터 첫성체를 영한 나는 도습리공소에서 세운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이 학교는 김신부가 한일합방후 일본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도록 공부하라는 뜻에서 세운 것으로 개교를 앞두고 김신부는 서울에서 직접 운동기구 교복 나팔등을 구입해오기도 했다.
이와 함께 김신부는 본당에 경애학교를 설립, 운영했는데 정심학교와 경애학교 학생들은 봄·가을 두차례에 걸쳐 운동회를 개최, 우애를 다졌다. 놀이기구가 시원찮은 때라 나팔을 불며 응원하던 것이 몹시 재미있었던때였다.
4학년이 되기전 아버지는 나를 보다 좋은 곳에서 공부시키기 위해 면소재지학교로 보냈다. 그 학교는 임충신 신부 부친(외조부 2째 사위)이 교장으로 계시던 곳으로 학생은 30명 정도였으며 40대의 만학도 동창도 있었다.
특별히 넘치는 것도 부족함도 모르고 자랐던 나에게 성소의 빛이 내린 계기는 별성자(別聖事), 바로 그 별성사였다.
특별성사의 준말인 별성사는 봄 가을 정기적인 방문 외에 본당신부가 특별히 1~2차례 공소를 방문, 성사를 집행하는 것을 뜻하는데 보통 8월경에 있게 된다.
이때면 마을 전신자들은 깨끗이 옷을 차려입고 음식도 정성껏 준비하는데 어린 아이들은 10~20리밖에까지 나가 사제를 영접하고 또 배웅한다.
문제는 성사를 마치고 배웅할 때였다. 본당 신부님(당시 김성학신부)의 자전거를 타고 마을 밖으로 배웅나갔던 나에게 신부님께서『너 신학교에 가고 싶지않으냐』고 물으셨다.
그때까지 신학교가 무엇하는 곳인지 그곳이「신부 만드는 곳」인지 전혀 몰랐던 나로서는 정말 뜻밖의 질문이었다. 기껏 신부님의 라띤어책을 몰래 훔쳐보고『신부님은 정말 이상한 것도 다 알고 계시는 특별한 분이로구나』생각했을 정도였다.
부모님께 말씀드리겠다고 대답하고 흥분된 가슴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어머니께 먼저 여쭤보았다. 『참 좋은 생각이다』며 기뻐하신 것은 물론이다. 그날 저녁 반대하실줄 알았던 아버님의 말씀은 의외였다. 『내겐 가라 말라할 권리가 없다.가고 싶으면 가라』
딱딱했지만 확고한 말씀이었다. 이튿날 아버님께서 신부님께 기별하자마자 곧 입학준비가 서둘러졌다. 세수수건, 코수건, 이불 솜바지 등…
드디어 신학교에 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때가 신학교 입학식을 불과 보름 남겨놓은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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