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간 오로지 나환우 진료에만 힘써 온 영주 다미안 피부과의원 의무원장 고경문씨(54·루까·서울 역촌동본당).60년 전남의대를 졸업한 고씨의 의사생활은 군의관 법무부 광주소년원에 재직한 초창기 10년을 제외한 71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환우 이동진료를 위해 여행한 거리만 부산서 백두산까지를 수십번 왕복한 셈이 될정도.
순수 나환우 치료기관인 다미안 의원에만 12년째 봉직하면서 요즘도 네 아들과 부인을 서울에 두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일주일의 대부분을 영주지역 나환우 진료에 헌신하고 있는 고씨를 찾았다.
『제가 하는 일을 봉사라고 생가기 않습니다. 월급받는 직업이지요』. 지난 22일 오후 구라주일을 맞아 나환우를 위해 일하는 봉사자를 소개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말에 고씨가 던진 첫마디 말이다.
그러나 고씨의 이말은 분명 겸손의 말이다. 그것은 고씨가 여느 의사처럼 도시에서 개업했더라면 사회적인 지위도, 경제적인 부도 누렸을텐데도 17년동안 애오라지 손발이 뭉그러지고 얼굴이 찌그러진 나환우진료에만 전념해 왔기때문이다.
메리놀회 스위니 신부(미국인·작고)가 6·25직후 설립한 천주교구라회 이동 진료반장 일을 맡은 71년부터 나환우 진료에 나섰던 고씨는 경남 거제·진해, 충남 천안·아산·당진·홍성·예산 등지를 매월 일주일씩 나환우이동 진료를 실시했다. 이후 76년 7월 1일 다미안 의원 담당의사의 갑작스런 공백을 메꾸기 위해 영주로 내려온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고씨는 영주·안동시와 영풍·봉화·예천·안동군 등 2개시 4개군 재가환자 및 6개 정착마을 나환우 개개인의 얼굴을 모두 알고 절반 가까이는 이름까지 욀 정도로 인연을 맺고 있다.
고경문씨는 당초 『소개될만한 인물이 못된다』며 취재를 거부하다가 『정착마을 나환우들이 나환우 입원환자들에게 돼지를 잡고 떡을 장만해 위문하는 흐뭇한 예기를 수사님들로부터 전해들었다』는 말에 『3개 수도단체가 나환우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도 함께 소개해달라』며 취재에 응했다.
『폐쇄적이던 나환우들이 남을 돕는다는 것은 상당환 발전』이라고 말하는 고씨는 2년여전부터 마리스타교육수도회 수사들이 『정착 마을에 신앙 및 정신교육을 실시한 결과』로 풀이하면서 정착마을도 단합한 곳은 생활수준이 향상되고 그렇지 못한 마을은 과거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고 소개한다.
그동안 『특별한 소신에 따라 일을 해왔다기보다 역마살이 끼었는지 활동적인 성격이 일을 하도록한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는 고씨는 『단순하고 심성이 착한 나환우들과 일을 해보니까 일반인들에게는 느끼지 못하는 정을 느끼게 됐다』고 밝힌다.
이동진료를 나갔을 때 『담배 한 갑이나 깨 1되씩이라도 건네주고 싶어하는 나환우들로부터 훈훈한 인정을 느낀다』는 고씨는 『끼니도 못이을 정도로 어려운 처지인데도 치료비를 꼭 갚는 사람도 있다』며 불구도가 워낙 심해 산속에 묻혀사는 두 내외가 뱀을 잡아 빚을 갚아올 때는 일반 건강인보다 더 성실한 자세를 배웠다고.
그런데 치료를 꼭 받아야 되는데도 자신의 병이 사회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 치료받지 않고 계속 악화되는 사람을 볼 때 가장 가슴 아프다는 고씨는 나환우에 대한 인식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나아진 편이지만 『나환우도 일반질환자와 똑같이 취급받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나환우가 단 1명이 남더라도 구라사업은 존속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고씨는 『환자가 치유됐을 때 가장 기쁘다』면서 결혼 적령기의 처녀를 가족들도 모르게 치료해줘 지금은 자녀를 낳아 잘살고 있는 모습과 치유받고 중동기술자로 일하러나간 청년이 귀국할 때마다 인사하러 올 때는 더없이 기쁘다고.
줄곧 가톨릭 단체와 일해 온탓에 늦었지만 지난 86년 7월 5일 영세한 고씨는 영주로 내려와서 가장 큰 소득이라면 『신앙을 얻은 것』이라며 영세전에는 행여미사에 참여할라치면 앉았다 일어서는 것이 귀찮고 지루했지만 지금은 미사때가 가장 마음이 편안해진단다.
『고통 중에도 항상 웃으며 신앙의 힘으로 어려움을 극복하는 신자나환우들을 농해 삶의 의미를 배웠다』는 고씨는 81년부터 다미안 의원을 운영해온 마리스타교육 수도회, 주방일과 환자의복 세탁일을 맡은 성모영보수녀회, 환자간호를 담당하는 골롬반 수녀회 등 다미안의원의 3개 수도단체 수사·수녀들과 생활하면서 신앙적인 영향을 크게 받은 점도 부인하지 않는다.
밥을 지을때도 쌀 한몰 허비하는 일이 없으며 피고름이 묻어있는 환자의복을 세탁하면서도 항상 표정이 밝고 얼굴 찡그리는 법이 없는 수녀들의 삶의 태도와 평소 침식을 같이하는 마리스타회 수사들에게서 신앙인의 모범을 본다고….
새벽 5시 30분에서 6시경 기상과 동시에 아침 기도로 시작되는 고씨의 일과는 7시 30분 수사들과 아침식사후 방청소를 하고 8시 50분 직원들과 함께 아침 조회를 대신 한 기도를 바친후 곧바로 직무에 들어간다. 주위에서「준수도자」라고 평하는 고씨의 다미안의원 12년은 월·화·목요일에 일반 피부과 환자들인 외래객진료, 금요일엔 입원환자 진료후 오후엔 상경해 가족들과 만나고 일요일 밤늦게 영주로 돌아오는 생활의 반복이었다. 이렇게 살아온 고씨에게는 요즘 큰걱정이 있다.
고씨가 나환자 진료에 처음 나섰을 때 50대이던 나환우가 70대가 되어버린 지금, 새로운 환자발견은 연간 5명 정도로 극히 미미한데 반해 기존환자들이 점차 노령화 현상을보이고 있는 추세로 경북 북부지역 나환우들의 평균연령이 57세를 기록, 나불구 노약자 보호시설(양로원)건립이 시급하기 때문.
이같은 상황에서 오래전부터 장차 일반양로원으로 바꿀수 있도록 설계된 나불구 나약자 보호시설 건립을 추진해오고 있는 고씨와 수사들은 금년중 양로원을 건립피로 했으나 7억여원이 예상되는 공사비에 턱없이모자라는 1억 4천여만원만 준비된 상태.
그나마 외국원조로 운영돼온 다미안 의원으로서는 금년부터 외국원조가 중단된 상태라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신심 깊은 신자로 살다가 죽는 것』이 소망이라는 고씨에게 작별 인사로 『구라주일을 맞은 전국 신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을 청했다. 『구라주일과 같은 특별주일에 헌금하는 것도 좋지만 항상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들을 위해 3백 65일 매일의 생활을 근검절약하고 희생하는 나눔의 생활화를 실천했으면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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