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셔서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해 주셨습니다』(요한 3, 16). 이 성경 말씀처럼 하느님은 이 세상에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실 정도로「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고 계신다. 다시말해서 이 세상은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있는 만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상징이자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상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온갖 폭력의 난무는 하느님의 영광보다는 악의 실재가 더 확실한 것으로도 느껴지게 하곤 한다. 때문에 선한 마음을 지닌 이들은 매일 매일 접하게되는 끔찍한 폭력 발생의 소식에 지쳐『이 세상을 사는 것이 적성에 맞지 않다』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이와함께 어떤 이들은 폭력에 대처하기 위한「폭력의 정당성」을 들고 나오고 있으며, 이 같은 주장들은 어떤 면에서 현대인들에게 상당히 설득력을 갖고 다가오기도 한다. 이번 평화시리즈에서는 평화를 이뤄나가는데 가장 큰 저해요소로 우리 주변에 상존(常存)하는「폭력」에 대해 전반적으로 알아 보았다.
이라크가 지난 8월 2일 쿠웨이트를 점령, 다국적군과의 무력 충돌 가능성이 점점 고조돼 가고 있는 것을 비롯 세계 곳곳에서는 지금도 전쟁 등 온갖 종류의 폭력이 난무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도 그 상황은 전혀 다르지 않다.
최근의 일만 들춰내도 ▲미혼모 박모양이 자신이 낳은 아기를 물통에 빠뜨려 죽게하고 ▲최모씨는 공중전화를 걸 동전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지나가는 행인을 벽돌로 때리는가 하면 공중전화 사용 독촉에 칼로 살인하고 ▲김모씨는 동거비용을 마련키 위해 국교생을 유괴 살인하고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운 각종 성(性)폭행과 담배불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폭행하는 행위 등 이루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폭력들이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폭력」에 대해 가르치는 전문가들은『인류문화 초기에 나타난 폭력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의 가족과 재산을 보호하려는 방어적 폭력의 형태를 취하였으나, 문명이 발달하면서부터 폭력은 주변의 집단을 공격하여 이득을 취하는데 사용되고, 또한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게 됐다』고 폭력발생의 역사적 발전 상황과 인류와의 밀접성을 말하고있다.
더욱이 현대에 와서 폭력은 과학과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해 고도로 첨예화 및 지능화돼 있어, 현대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폭력에 접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같이 현대인들은 폭력적인 상황을 쉽게 체험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폭력에 대한 명확한 태도표명 요청은 삶의 방식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현대인의 삶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세상에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을 증거해야 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폭력」문제는 정당한 폭력의 사용 가능성 논란과 함께 확실히 짚고 넘어갸야만 하는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돼 있다.
폭력의 개념 및 유형
폭력에 대한 개념 정의는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폭력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처신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러 학자들이 폭력에 대한 정의를 각도에서 풀이하고 있는데 전통적으로『폭력은 사람이 불법 부당한 방법 또는 물리적으로 강제력을 행사하는 힘』으로 보고 있다.
이런 정의는 현대에 와서 너무나 좁은 개념이라는 비판과 함께『폭력은 물리적이고 개인적인 공격뿐아니라 단체적이고 심리적인 공격도 포함하는 것, 즉 사람을 비인간화시키는 모든 행동』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이 개념을 기초로 폭력의 유형들을 보면 크게 ▲강간이나 살인과 같은 개인간끼리 끼치는 물리적 폭력 ▲전쟁과 같은 단체화된 물리적 폭력 ▲타인으로 하여금 강제로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도록 위협하는 것과 같은 심리적 폭력 ▲경제구조 및 사회체제에서 오는 조직화된 체계적 폭력 등으로 분류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폭력에 대한 개념이나 유형분류는 폭력에 대한 시각을 근본적으로 달리하고 있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아주 다르게 해석되고 있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성서를 근거로 서로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폭력에 대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크게 세부류로 나눠지고 있다. 첫째, 폭력은 지지하거나 찬성하는 입장. 둘째, 어떠한 폭력적인 형태도 거부하는 비폭력적인 입장. 셋째, 폭력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는 반대하나 모든 비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한 후에 최후의 수단으로 폭력을 인정하는 타협적인 태도 등이다.
폭력에 대한 이 같은 세가지 입장을 구체적으로 보면, 폭력을 지지 또는 찬성하는 이들은『체제가 도덕주의적, 획일주의적 혹은 위선적인 휴머니즘으로 기울 때 폭력이 이 거짓을 깨뜨려주는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며『폭력은 사회의 아픈 곳을 드러냄으로써 치료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비폭력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들은『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깨달음에서만 오고 이 진리가 무엇인지 아는 자는 폭력이 아닌 사랑으로서 대처하게 된다』며『예수는 비폭력 저항의 모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폭력을 최후수단으로 인정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이들은『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하는 물음 대신 그 방법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느냐라고 물음을 던져야 한다』고 하면서『악이 덮치는 막바지 상황에서 정상시의 도덕관과 윤리관은 그대로 적용될 수 없으며 이때에는 폭력의 사용이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폭력에 대한 또 하나의 이해라고 할 수 있는 해방신학의 입장은 넓게 보면 경우에 따라 두번째 또는 세번째 부류에 속한다고 볼 수 있는데, 폭력을 이해하는 관점에서는 특이한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해방신학이 이해하고 있는 폭력은 바로「불의-정의」의 기준으로 설명될 수 있다. 즉, 해방신학에서는 폭력의 문제를 접근하는데 있어서 근원적인 정의질서를 토대로 하여 폭력에 대해 언급한다.
다시 말해서 해방신학은 제도화된 폭력이 상주하고 있는 가운데 폭력의 개념을「합법성」이라는 관점에서만 다룬다면 인간의 기본권까지 침해하는 폭력행사가 있을 때에도 그것이 법에 저촉되거나 법의 한계를 벗어날 경우에만 폭력으로 인정되는 오류를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해방신학자들은 합법적인 폭력에 대한 자각을 촉구하면서, 합법적인 폭력으로 ▲정치체제와 사회 경제 질서에 불의한 상황을 영속시키려고 하는 법령 ▲온갖 형태의 정치적 고문 ▲사람들의 양심과 의식적 자각을 교모하게 오도하기 위해 포고되는 허위선전 등을 제시한다.
아울러 해방신학자들은『이같이 권력이 공동체의 통제력을 벗어나서 사용될 때, 더 나아가서 그것이 권력자 자신을 위해서 민의를 거슬려 사용되거나 아니면 본질적으로는 불의한 합법적 제도를 옹호하기 위해 사용될 때에는 그 권력은 겉으로는 합법적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폭력』이라고 규정한다. 즉 해방신학에서 폭력은 인간의 기본권을 박탈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결단에 따라 스스로의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하는「불의」를 지칭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해방신학에서는「불의-정의」라는 기준에서 폭력을 판단하고 폭력을 단죄하면서 제도화된 폭력에 관심의 촛점을 맞추어야지 이 폭력에 저항하여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폭력의 반작용에 촛점을 맞추는 것으로 폭력문제를 잘못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폭력에 대한 교회의 입장
교회는 제2차 바티깐공의회「사목헌장」에서『교회는 교회가 보관하고 전수시키는 바로 그 메시지의 중심에서 형제애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위해 행동한다는 영감과, 일체의 지배, 예속, 차별, 폭력, 종교자유의 침해, 인간과 그의 생명을 공격하는 여하한 침범에 대항하는 행동을 하라는 영감을 발견한다』고 불의에 대항하는 행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명백히『폭력을 통한 사회문제의 해결은 거부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같은 교회의 입장은 교황의 회칙「민족들의 발전」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 회칙에 따르면『교회는 사회문제의 해결방법으로 폭력을 거부한다. 폭력은 생명을 거스리고 인간을 파괴하며, 반대세력을 자초하고, 투쟁사태를 유발하게 되며, 극단의 폭력과 폭력의 남용을 초래하기 때문이다』라고 교회의 폭력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이와함께 교회는 폭력 사용을 반대하는 것과 동시에 평화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을 파괴시키는 폭력에 대해 저항해야 한다』면서『불의의 원인이 되는 과도한 경제적 불평등과 인간의 지배욕, 인간경시 현상, 이기적인 사욕 등을 배격해야 하며 폭력의 방종을 억제하기 위하여 국제기관의 협력과 조정을 강력히 추진하는 한편 평화촉진을 위한 조직체의 구성에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요청하고 있다.
아울러 교회는 폭력을 발생시키는 근본적인 원인을 근절키 위해『사람들의 정신과 풍습, 사회 공동체의 법제, 조직을 그리스도교화 시키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삼아야하며 현재의 생활조건을 근본적으로 대신해야 한다』고 제시하고 있다.
또한 교회는『폭력의 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일관할때 폭력에 대해 어느정도 동의한 것이 된다』면서『세상의 폭력에는 어느정도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교회의 입장과 함께 많은 사목자들은 실천적인 부분에 있어 이 교회의 가르침이 구체화될 수 있도록 신자들에게 폭력이 난무하는 현시대에서 취해야 할 입장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실제적 측면에서 볼 때 신자 개개인이 폭력을 당하는 피해자의 입장에 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측면 또는 입장에 따라서는「폭력」을 수행하는 주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일선 사목자들은 신자들에게 ▲구조적인 폭력과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개인적인 폭력을 극복하는데 여러 지침을 주고 있는데 주된 내용은『비폭력적인 방법, 즉 사랑의 힘으로 폭력을 극복하는 것』에 공통점을 두고 있다.
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올바른 신앙의 고백과 함께 이 신앙을 일상적인 삶 안에서 실천해 갈 수 있는 실천력을 키워가는 것을 들고 있다.
그 다음의 행동으로서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와 공동체 일원으로서 공동체가 폭력을 극복하고 평화를 실천해 나가기 위해 추진하고 있는 일에 적극 동참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아울러 선결 요건으로서 자신의 가정에서 모든 폭력적 요소들을 제거, 가정이 가족구성원 모두가 평화를 실천하는 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뿐만아니라 폭력적 사건들을 접할 때 단순히 지나치기보다 다시 한번 자신의 입장을 성찰하고, 그 폭력적사건에서 나오는 인물이 하느님과 다시 화해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라고 요청한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