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도 미사경본에는 이전에 이 성체성사 현양을 위해 순회성당으로 정해졌던 로마의 대성전에 관한 언급되고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습이 옛날의 형태만큼은 못하나 적어도 사순절 동안은 아직도 오늘날 로마에서 그대로 시행되고 있다. 실로 그리스도교 국가의 적지않은 교회가 최근 10년간 이 고대의 관습을 되살리고 있다. 그리고 교황 요한 23세가 몸소여러번 로마에서 순회전례집전에 참석한 것은 오랜 관념이 되돌아온다는 명백한 표기가 된다.
성체대회
오늘날 이러한 전례적 부흥은 다른 현저한 방법으로도 드러나게 되었다. 1881년 이래 세계성체대회는 그리스도교의 여러 국가에서 개최되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신앙의 증거요, 고요한 감실 속에서 우리와 함께 머무시는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의 표현이며, 공공생활의 세속화에 항거하는 강력한 반항이었을 뿐이었다. 대회의 절정은 행렬이었다. 1912년 비엔나에서 거행된 세계적 규모의 「그리스도 성체」축일은 대축제가 되었다.
그러나 점차로 교회 초기에 정립된 근본적인 관념은 교회의 내적 구조 및 성체의 특성과 밀접히 결부된 것이었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오늘날 그 진실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실로 성체성사의 신비가 그 심오한 의미를 충분히 실현함은 바로 이 성체대회에서다. 이것은 오늘날 교통의 편리로 정체모를 떠돌이 군중들이 대도시로 몰려드는 그러한 집회가 아니라 오히려 20세기 하느님 교회의 집회인것이다, 게다가 초기 사도시대에서 볼 수 있는것처럼 여기서도 전체교회를 볼 수가 있다.
이 성체대회에서는 로마의 순회 전례집전소에서처럼 교황이나 교황의 공식 대리자가 전례를 집전했다. 이리하여 1912년이래 교황사절은 성체대회 집전의 주례자가 되었다. 그는 많은 국가에서 온 주교, 세계각국에서 온 성직자와 평신도들에 둘러싸여 하느님께 희생제물을 바친다. 세계성체대회가 그리스도교의 세계 순회 전례집전소가 되는 도중에 있다.
지난 수십년간에 걸쳐 전례발전에 기울인 독일어권 교회의 충실한 노력이 효과가 없지 않았다는 사실이 증명된 시기인 1960년의 뮌헨행사는 이 고무적인 생각이 가치있음을 증명하기에 이르렀다.
성체성사의 신심
그러나 우리는 손쉽게 승리를 얻으려고 한다거나, 그리고 성공리에 치루어지는 집회가 바로 겨냥할 목표하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참된 성공은 「아멘」이나 다른 응답을 목청껏 부름으로써, 공동체가 찬미의 노래를 활기차게 부름으로써 예절을 아무 실수없이 거행함으로써, 심지어 많은 신자들이 영성체함으로써 얻게되는 것이 아니다.
전례의 온갖 장엄성, 심지어 거룩한 제사 자체는 오직 하나의 상징일 뿐 그 이상의 것은 될 수가 없다. 그것은 신심의 내적 태도에 대한 상징이요, 그분의 뜻을 따르는 하느님 백성의 순종의 상징인 것이다. 이것은 곧 그리스도교 신자의 순종을 의미하며 이 순종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고, 그분께서 당신 교회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계명에 순종할 준비를 갖추며, 성령의 능력으로 세상의 변화를 가져오도록 기여하기를 열망한다.
이 위대한 축제가 이처럼 우리에게 부과한 큰 의무를 의식한다는 명백한 표징을 다양한 측면에서 깨닫는 이는 행복하다. 교구 사목계획, 청년단체의 슬로건, 예비문학으로 보아, 우리는 지금부터 성체대회때까지의 당연히 내적 준비기간이어야 함을 깨달아야 한다.
실제로 성체성사의 신심이아무리 거창한 모습을 지닌다해도, 우리의 평범한 일상사와 무관해서는 안된다. 또다른 한편으로 온갖 형태의 교회활동 및 본당사업과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의 윤리 및 종교생활이 성체성사 거행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바 그리스도인 신심의 일반 도식과 무관하게 될 때 심한 손실을 입게된다.
신약성서에는 주석가의 입장을 당혹하게 할수있는 연관된 성서구절이 있다.
베드로전서(2장 5절)에서 신자들은 자신들이 영적인 성전에 세워진 살아있는 돌이어야하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적제사를 봉헌하기 위해』거룩한 사제가 되어야함을 상기한다.
여기서 과연 우리가 제대위에서 봉헌하는 제사 곧 참된 영적 제사에 실제로 하느님의 성령이 충만하다는 사실에 문제가 있는가? 그렇지않으면 오히려 그 의미는 신자들이 신앙과 사랑과 선행안에서 또 그것으로써 일종의 은유적 사제직에 대한 요구를 스스로 수긍하면서 하느님을 경배해야한다는 것인가?
이 두관념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것 같다. 즉 제사와 사제직이 실현되는 것은 바로 이 두관념을 조합하는데 있다. 하느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순종이 매일 또 매시간 표현되어야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계약의 제사가 그리스도 신자의 전생활을 드러내는 제의적 표현과 성사적 요약이 되기보다 오히려 단순히 그 자체를 위해 수행되는 행위로 생각함은 결코 사도의 사상이 아니다. 한편 성사의 실재와는 거리가 먼 단순히 경건한 지향만을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하고 성부의 뜻을 따르려는 그분의 순종에 참여하려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관조함 역시 사도의 생각이라 할 수 없다.
성체성사가 성사들의 건축물을 완성시키는 모퉁잇돌을 의미하는 것처럼, 성체성사의 기능은 하느님을 경배하기 위해 그 상황을 조성하고 하느님의 백성을 준비시킬 뿐이다. 또한 모든 사람과 모든 계층간의 조화있는 일치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성체성사 집전의 본질인 것처럼 성체성사는 모든 이 인간생활, 모든 천상적 갈망에 맞갖는 현세의 모든 활동, 하느님을 찾는 모든 희구 뿐 아니라 모든 지상적 행복을 포용할 만큼 포괄적인 것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것은 시간의 전 영역 및 인간에게 관련된 것을 송두리째 품고 있는 그리스도의 제사안에 흡수되고, 마침내 그것들은 만물의 시작이요 끝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과 안식을 찾을수 있게 된다.
〈제공=성체대회 준비위원회 사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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