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경」은 이승훈이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은 곳이다. 1783년 동지사(冬至使)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된 부친을 동행, 북경으로 간 이승훈은 당시 강학회를 통해 천주교 서적을 탐구하고 수계생활을 이끌었던 초기 조선천주교회의 거두 이벽의 권고에 따라 북경에서 그라몽 신부(예수회)로부터 세례를 받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6년 전인 1784년 2월초의「사건」이었다.
이렇게 북경과 인연을 맺은 조선천주교회는 교회의 확산과정에서 계속 북경과 연견을 가질 수 밖에 없게된다. 성직자 없는 교회로 평신도에 의해 설립된 조선천주교회로서는 북경 선교사로부터의 가르침은 필수적인 과제였기 때문이다.
북경 구베아 주교는 1790년 조선교회 밀사로 북경에 간 윤유일을 통해 성직자 파견을 약속하고 그 약속대로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이 땅에 발을 딛게 된다. 1795년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북경은 조선천주교회 평신도들의 주요활동무대가 된다.
이어지는 박해와 순교 속에서 주문모 신부를 잃은 조선천주교회는 다시 성직자영입에 나서게됐고 1811년 새로운 조선교회지도자 이여진이 북경에 파견된다. 1816년 역시 성직자 영입을 위해 북경에 첫 발을 디딘 정하상은 그로부터 10여년간 9차례에 걸쳐「북경」을 드나들게 된다.
조선천주교회 역사 속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북경, 중국의 수도 북경으로 가는 길이 멀고 험난했음은 강조의 여지가 없다. 단 한번의 왕복길에 반년여의 세월을 쏟아부어야했던 북경으로의 행로 2백여년이 지났건만 그 길은 여전히 멀고 어렵기만 했다.
서울에서 직행항로로 1시간30분 정도가 걸리는 이 길에 우리는 4시간이 넘는 아까운 시간을 더 보태야 했기 때문이었다.
북경 공항에서 시내까지 차로 약30여분 달리다보면 편편하게 다듬어진 도시「북경」이 나타난다. 도무지 산이라고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평야 위에 세워진 이 도시는 변화하는 중국의 현주소를 쉽게 잃게해주는 하나의「샘플」같기도 하다.
구내성(舊內城)과 구외성(舊外城), 그리고 성외(城外) 등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진 북경의 새로운 숨결은 성벽 바깥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북경의 원래모습은 보호하기위해 새 건물들은 대부분 성외지역에 세워졌고 공장, 아파트, 호텔들이 준비한 이곳은 북경의 중심지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있다. 그건 신선함이다.
겉치장보다는 실속을 중히 여기는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특성을 자취들은 중국의 상표처럼 곳곳을 장식하고 있지만 깨끗하고 말씀하게 들어선 새 건물들은 구각을 벗으려는 중국의 새로운 도전의 산물인 듯 했다.
뭐니뭐니해도 북경, 아니 중국의 명물은「천안문광장」. 구황성(자금성)의 남쪽 끝 정문에 해당하는「천안문」은 명대(明代)에 지어졌고 청대(淸代)에 개축된「중화인민공화국」의 상징에 해당한다. 근대 중국역사에 있어 주요사건의 현장이기도한 천안문과 그 광장에 대한 호기심은 불과 1년전 일어난 이른바「천안문사태」에 기인한다고 볼수있다.
세계최대의 넓이를 자랑하는 천안문광장은 광장 중심부에 세워진「인민영웅기념비」를 필두로「역사박물관」「혁명박물관」「인민대회당」등 일련의「거대건물」들은「인민」의 현실과는 동떨어진듯한 사회주의 국가의 독특한 냄새를 진하게 맛볼수 있는 생생한 현장이었다.
「자금성」역시 북경을 찾는 이들에게 거대한 중국땅을 실감케 해주는 명물이었다. 하루를 보아도 다 못본다는 말에 걸맞게 세계 최대의 규모를 뽐내는 자금성에서 관람자들은 어마어마한 외모에 진정 놀랄 수 밖에 없다.
「태화전」「중화전」「보화전」등 각 궁들이 일직선으로 늘어선 외조(外朝ㆍ황제가 정무를 보던 곳)의 규모도 규모려니와 각 전(展)마다 장식된 계단의「돌판」들을 살펴보면서 놀라움 속에 안타까움을 보태게된다.
황제의 위용을 상징하는 용이 조각된 이 돌판들의 두께는 약 60여미터.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길이 16미터, 넓이 3미터가량의 이 엄청난 돌판들은 북경에서 1백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부터 옮겨와 조각한 것이라는 설명에서 사람들은 돌더미에 깔려 죽어갔을 수많은 생명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절대군주의 절대적 영화, 그 끝은 이미 세계 각국의 역사적 교훈을 통해 알려진바 대로지만 자금성의 관람은 이 같은 역사적 교훈을 다시한번 강력히 일깨워주는 계기가 됐다. 자금성은 인간의 위대한 힘의 발견과 더불어 그 힘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 분명했다.
10세기 거란족이 세웠던 요나라가 수도로 설정하면서 중국역사 중심부에 등장하는「북경」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중국 역사의 흥망성쇠 안에서 오늘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는 몽고가 지배하던 원나라당시 북경은 로마교황의 명을 받은 선교사들을 비롯 유럽과 이슬람 상인들로 붐볐던 무역의 중심지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선교사의 등장」은 북경에서 아니 중국에서 그리스도 복음화의 본격적인 시작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당ㆍ원나라시대에 시도되었던 프란치스꼬회의 선교는 원나라의 멸망과 함께 소멸돼 버렸고 그리스도교는 명시대에 와서 다시 중국땅에 상륙하게 된다.
그 유명한「천주실의」의 저자 마태오 리치 신부는 그의 선배이자 예수회 창립 멤버인 프란치스꼬 사비에르 신부가 못이룬 중국전교의 꿈을 이어받아 1583년 이 거대한 땅에 첫 발을 내딛는다. 북경의 주교좌이자 중국 최고(最高)의 교회인「남당」(南堂)의 기초는 마태오 리치 신부가 놓았다.
1601년 북경에 도착한 리치 신부는 1605년, 황제가 하사한 땅위에 지은 최초의 교회는 1650년 청대 역시 예수회원인 아담 샬 신부에 의해 성당의 모습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1775년과 1900년 화재로 불타버린「남당」은 1904년 현재의 대성당으로 재건립됐다.
원죄없이 잉태된 성모마리아 대성당-남당의 일요일 아침미사(7시30분)는 신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북경시내 선무문(宣武門)내에 위치한「남당」을 새벽같이 방문한 문화사절단은 북경 부철산(傅?山)주교와의「다소긴」만남 끝에 북당 미사를 허가 받을 수 있었다.
「남당」방문은「북당」못지않게 나를 흥분시켰다. 선교사 영일을 위해 북경을 드나든 조선천주교회 평신도들이 남당을 방문하고 세례를 받았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않는가. 당시 남당의 위치에 비추어 볼 때 주교가 있었던 곳은 남당이었고 선교사요청도 주교를 통해 하는 것이 원칙이라 볼 때 유진길, 조신철, 정하상 등이 북당과 더불어 남당을 방문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정치적 혼란기에 철저히 파괴되었던 남당이 다시금 문을 연지 10여년, 제2차바티깐공의회 이전의 예식으로 미사를 봉헌하는 남당의 주일미사는 25년 전의 우리의 모습과 크게 다를바 없는 듯 했다.
그러나 묵주를 목에 걸고 담소하는 한 무리의 신자들 틈에서 노인들이 대다수인 신자연령층에서, 오랜 단절이 가져다 준 공백의 자락이 손에 잡혀지는 듯 너무나 확실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남당에서 버스로 약 15분정도 소요되는 거리에「북당」(北堂)은 있었다.
이승훈의 영세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북당은 남당과 마찬가지로 오랜 풍파를 견디어낸「노장다운」모습으로 맞아주었다. 전면(前面)이 하나의 벽면으로 건축된 남당과는 달리 북당의 건축양식은 두개의 돔이 돋보이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언뜻 프랑스의 노트르담 성당의 작은 방에서 소박한 미사가 봉헌됐다. 이승훈 베드로가 세례를 받은 해로부터 꼭 206년만의 일이었다.
본당의 첫 모습은 1703년에 드러냈다. 「우리구세주의 대성당」으로 명명된 북당은 124년이 지난 1827년 황제의 명에 의해 몰수당하고 파괴됐다.
1860년 땅 일부가 교회로 돌아온데 이어 6년 후 더 큰 규모의 새성당이 건립됐다. 이 기간 중 북당은 남당을 대신하여 주교좌의 임무를 맡기도 한다. 1887년 청 황가가 궁성을 확장하면서 북당을 둘러쌓기 시작했고 북당은 다시 자리를 옮기게 된다. 1900년대 들어 북당은 훨씬 큰 모습으로 건립됐으나 문화혁명기간 중 다른 성당들과 더불어 심한 손상을 입었다.
85년 북당은 화려했던 옛모습을 찾았으며 중국의「중요보존물」의 하나로 지정되기에 이르렀다.
박해와 순교로 점철된 고난의 시기, 목자를 찾아 중국을 헤멘 우리 평신도들의 발자취를 그들의 주요 활동무대였던 북경에서 찾는 일은 쉽지가 않다. 격변과 혼란, 그리고 단절 속에서 흘러가버린 세월이 너무나 길고 또 길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우리는 그 작업을 해야만한다. 그것은 바로 잃어버린 우리교회사의 한 페이지를 찾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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