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봉사」라 일컬어지는「호스피스」에 대한 설명과 그 필요성은 그동안 많이 소개돼 왔으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하게 느껴진다. 이 글은 지난해 10월 31일「호스피스」봉사자 교육모임에서 발표된 박차남(수산나ㆍ서울 청담동본당)씨의 「호스피스 봉사활동 체험수기」이다. 이 체험수기를 4회에 걸쳐 게재한다.
<편집자註>
저는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호스피스」라는 야릇한 단어를 간혹 접하곤 했읍니다. 우리나라 말로는「임종돕기」또는「선종간호」라고 했읍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 한구석에『어떻게 죽는 것을 도와줄 수 있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읍니다. 이러한 관심을 가져서인지 인근에 있는 성모병원에서 「호스피스」봉사의 기회를 갖게 되었읍니다.
지루한 교육기간을 거친 후 강남성모병원에서 정식「호스피스」병동 개원과 함께 자원봉사 활동을 시작했읍니다.
최근 죽음을 앞둔 환자와 함께 죽음에 대하여 그의 부인과 더불어 의논하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하게 하였던, 나에게 다소 감격적이었던 한 봉사체험을 적어보았읍니다.
1988년 4월말경이었읍니다. 호스피스 과장수녀님께서 대구에서 올라오신 환자분이 계시는데 저와 말씨가 비슷하여 친근감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으니 한번 방문해 보라고 하셨읍니다.
저는 환자를 방문하기 전에 병원 성당에 들러서 성체조배를 하였읍니다. 『주님! 저는 몸만 가니까 환자와 가족들의 마음은 주님께서 다스려 주시고 열어 주시옵소서. 아멘』하고는 병실로 발길을 옮겼읍니다.
병실은 9010호, 1인용 특실이었읍니다. 들어가니까 침대에는 미남형의 환자인 조현치 형제님이 계셨읍니다. 환자는 머리가 다 빠져 있었읍니다. 그래서 금방「암환자」임을 알 수 있었읍니다. 그 옆에는 예쁘고 세련된 부인이 힘없이 서 계시고 뒤에는 한숨을 내쉬시는 할머니 한분이 계셨읍니다. 나중에 안 사실입니다만 환자인 조형제님은 대구에서 사업을 하시는 사장님이시고, 옆에 서서 있던 남자분들은 조형제님의 거동을 도와드리는 회사 직원들이라고 했읍니다. 호스피스 대상 환자들은 대부분 장기간에 걸쳐 입원이 잦으니까 방문객이 거의 없는데 비해서 이 방은 다섯사람의 시선이 한꺼번에 저에게 몰려와서 저는 병실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몹시 당황했읍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안녕하세요? 병원 자원봉사자입니다. 혹시 도와드릴 것이 있나해서 방문하였읍니다』라고 말을 꺼냈읍니다. 상냥한 부인께서 반갑게 맞이하며『고향이 대구신가요?』하고 물었읍니다.『대구는 아니지만 대구와 가까운 울산입니다』라고 하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었읍니다.
부인은 개신교 신자라고 하였읍니다. 그러면서 이 병원에서는 찬송가를 불러주고 기도를 해 주시는 분이 안계시느냐고 물었읍니다.
저희「호스피스」봉사자들이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다고 했읍니다. 그 순간 저는 당장 기도라고 해 드리고 싶었읍니다. 그러나 저는 낯선 다섯사람 앞에서 그것도 초면이라 기도도 못하겠고 혼자서 성가도 부를 자신이 없었읍니다.
첫날이고 하여 준비도 없이 방문했기 때문에 인사만 하고 그냥 병실을 나왔읍니다.
일주일 후 저는 이 모든 사실을 우리 화요 조장님께 말씀 드렸읍니다. 호스피스 봉사자는 요일별로 구분되어 있었고 저는「화요일조」로 소속되었으며 화요일조는 모두 9명이었읍니다. 병실의 환자와 가족은 기도와 성가를 원하고 있는데 저 혼자로서는 도저히 힘이 부족하니 도와 달라고 도움을 청했읍니다.
그날 화요조 9명 모두가 그 환자 병실을 방문하여 기도와 성가를 해 드리기로 하였읍니다.
우리 화요조는 병실로 들어갔읍니다. 그런데 환자인 조형제님 가족들은 치료를 위하여 입원을 하긴 했지만 사실상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읍니다.
사업을 하시는 조형제님은 사업이 한창 번창하고 있는데 「콩팥암」에 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동안, 1년여동안 할만한 치료라면 다 받고자 하였으나 「암치료」는 어쩔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읍니다.
조형제님은 처음에 빈손으로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사업은 너무 잘 되어 섬유공장을 하나 세우고 사업은 계속 번창하여 여러 개의 섬유공장을 지어 운영중이라고 합니다. 지금도 구미공단 안에 또 하나를 짓고 있는 중이라고 했읍니다. 이제 어느 정도의 재산과 명예를 얻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하필이면「암」이라는 도저히 치료가 될 수 없는 불치의 병에 조형제님이 걸리게 된 것을 너무나 안타까와 하고 있었읍니다.
우리와 함께 기도를 하였읍니다. 성가를 부를 차례가 되었읍니다. 성가는 부인이 개신교 신자임을 감안하여 함께 부를 수 있는 성가를 골랐읍니다. 성가집 61장「주예수와 바꿀 수는 없네」를 불렀읍니다. 부부도 함께 성가를 하다가 가사중에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명예도 버렸네」이 대목에서 환자인 조형제님은 눈물을 삼키느라 눈을 감으시고 노래 소리가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읍니다.
이 순간 우리 모두는 가슴에 무언가 찡한 감정을 느꼈읍니다.
이 병원에 입원한지 열흘이 넘었는데 처음으로 기도와 성가를 부르게 된 시간을 갖게 되어 매우 흐뭇한 기분이라고 부인이 말하였읍니다.
우리는 첫날 이 병실 방문이 감격적이었고 환자와 그 가족들과는 오랜 친구를 만난듯 친근감을 느낄 수가 있었읍니다.
그후 우리는 매주 화요일마다 방문하여 한시간 이상씩 기도와 성가를 불러 드렸읍니다. 그리고 따뜻한 이야기도 같이 나누었읍니다. 환자와 부인은 우리들의 방문이 너무 기다려진다고 말씀 하셨읍니다. 그래서 우리 화요조는 화요일이 아닌 요일이라도 각자 틈이 나는대로 수시로 환자를 방문하기로 하였읍니다.
4월말부터 7월말경까지 우리 화요조는 계속해서 방문하여 기도와 성가의 봉사를 해 드렸읍니다. 어느덧 3개월이 흘렀읍니다. 환자와 부인은 우리의 기도에 감명깊어 했읍니다. 우리들도 「호스피스」봉사자로서 정말 봉사의 보람을 느껴만 갔읍니다.
그런데 8월초 「호스피스」봉사자들은 한달 동안 여름방학을 하게 되었읍니다. 3개월 동안 계속하여 봉사활동을 해왔는데 막상 방학이라 하여 한달을 쉴려고 하니 무언가 섭섭하기도하고 환자와 가족이 우리를 기다릴 것 같았읍니다.
그래서 방학 중 저 혼자만이라도 시간나는대로 방문하기로 했읍니다.
박차남
<수산나ㆍ서울 청담동 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