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당의 주임신부는 1년에 2번 관할공소 순시가 정해져 있었다. 보통 봄ㆍ가을로 순시를 했다. 한 공소에서 열흘씩 머물렀는데 장소에 따라 한달정도 걸리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공소로 떠나기 며칠 전 반드시 방문일정과 판공을 준비시키는 배정기를 보냈다.
그러면 다음 공소에서는 그 배정기를 받고 신부 맞을 준비를 하는 한편 짐꾼을 보내는 것이었다.
보통 3명을 신부한테 보내는데 한명은 영접군이었고 다른 이들은 짐꾼이었다. 신부가 공소 순신를 갈때는 짐이 세개였다. 대바구니에 종이를 발라서 만든 상자에 미사도구를 넣은 미사짐ㆍ이불짐ㆍ성물짐이 그것이다. 성물짐은 지금같이 본당에서 성물을 구입하기가 힘든 때였으므로 신부들이 피정을 갔다가 성물을 사서 갖고 다니며 순시 때마다 신자들에게 판매하였다.
이불집은 신부 자신의 이불을 넣은 것으로 그 당시는 부자라야 이불이 몇채되었고 보통사람들은 한채의 이불로 사시사철을 덮고잤다. 그래서 겨울이 되어 방에 불을 지피면 이불에서 지네ㆍ이 등이 기어나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이니 공소에 신부 이불이 있을턱이 없었다. 그래서 불편하지만 신부들은 자신의 이불짐을 싸들고 다녀야했다. 그러나 얼마 후부터 이불짐은 필요 없게 되었다. 공소신자들이 어려운 가운데 신부 이불을 마련해주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사고나서는 자전거에 이 세개의 짐을 전부 옮겨싣고 다녔다.
앞서 말한 배정기는 그 당시 사목생활상 꼭 필요했다. 살림들이 넉넉치 못했고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갑자기 손님이 오면 장을 못봐 내놓을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전편지는 상대방을 배려해주는 표시이기도 했다. 이는 공소 순시 외에 먼곳에 있는 이를 방문할 때도 적용되는 생활예의였던 것이다.
몇날 몇시에 도착한다는 신부의 배정기를 받은 공소는 그때부터 잔칫집 분위기가 된다. 신부를 영접한 짐꾼들을 서둘러 보내고 나머지 사람들은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신부를 기다렸다. 지금도 대부분의 신자들이 신부를 아끼고 염려해주지만 그 당시 교우들은 신부들을 매우 사랑하였다. 그 지방의 특산물을 이용해 특식을 만들었고 떠날 때는 이것저것 좋은 것을 챙겨주기 바빴다. 동동주를 담가주고 송이버섯 말린 것 등을 싸서 넣어주고…
한편으로는 신부를 무서워했다. 신부가 오면 반드시 거쳐야할 엄격한 문답시험은 신자들의 골치거리(?)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당시는 내가 어렸을 때보다 많이 누그러진 편이었다.
공소에 도착한 후의 일정은 대개 문답시험을 한 후 점심을 먹고 고백성사를 주었다. 오후 내내 성사를 준 뒤 저녁에는 식사 후 공소회장에게 대세를 받았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보례를 주었다. 그러면 보례받은 아이들의 부모가 잔치를 준비、전 공소신자들이 함께 모여 음식과 대화를 나누었다. 어린이들의 노래발표 순서도 있어 그날은 그야말로 공소잔치였다. 전북 부안본당은 내가 등용리에 부임함으로써 본당으로 승격되었는데 여기에 속한 공소에는 내장산에 있는 두 개의 공소도 포함됐다. 그런 험악한 곳의 공소에 가자면 한달은 족히 잡아야했다.
신자들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신부의 지위는 높았다. 아직 반상(班常) 개념이 남아있던 그때 신부는 양반에 속했고 기차를 타도 관리와 같이 2등칸 이상을 탔다. 또 신학ㆍ철학을 우리같이 공부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한국인이었지만 일본인들도 큰소리 치지 못했다. 그리고 항상 수단을 입도 다녔다.
남녀가 유별했던 그때 남녀칠세부동석은 신부의 식사 때도 적용되었다. 지금은 대부분의 본당에 식간이 있고 가정부가 있어 식사해결에 별 어려움이 없지만 여자라면 어머니라도 멀리해야했던 당시 신부들은 밥하는 식모와 밥상을 들고 들어오는 신부를 따로 두었다. 서양신부들은 식부(食夫) 한명이 요리도 하고 시중을 들었으나 한국신부들은 식부ㆍ식모를 모두 두어야하니 번거롭기 그지 없었다. 식부ㆍ식모 둘 형편이 안되는 신부들은 식사해결에도 애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