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본「성경직히」는 앞에서 말한 한문본「성경직해」와「성경관익」을 한글로 번역하고 이 두책에서 당시 한국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더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택해서 하나로 편찬한 것이라고 한다. 두 책에서 선택하되「성경직해」에서는 성서의 본문、주해 및 잠(箴) 부문을、「성경광익」에서는 마땅히 행해야 할 덕목인 의행지덕과 마땅히 힘써야할 기도인 당무지구의 부문을 선택하여 수록하였으며、따라서「성경직히」를「성경직히광익」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은 것이다. 「성경직히」에 수록된 4복음서의 분량은 전체 3천7백9귀절 중 1천1백38절이며 30ㆍ68%에 해당되는데、마태오복음의 경우 총 3천7백9귀절 중 1천1백38절이, 마르코복음의 경우 6백80절 중 중 1백18절이、루까복음의 경우 1배80절 중 3백67절이、요한복음의 경우 8백79절 중 2백80절이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1790년 경에 번역되어 천주교인들에게 보급된 「성경직히」는 한국 천주교인들을 복음서에 접할 수 있게 만들었을 뿐만아니라、이로써 복음의 말씀을 통하여 신앙공동체의 기반을 확립했으며、복음서의 한국적 수용을 자연스럽게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외에도 한글로 쓰여진 최초의 천주교 서적으로 정약종 (아오스딩) 의「주교요지」와「성교전서」를 들 수 있다.
아마 정약종은 불리오(LㆍBuglio) 신부의「주교요지」에서 힌트를 얻어 이 책을 저술한 것 같다. 이 책은 저자의 교리를 보급하려는 지칠 줄 모르는 열성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새 교리를 모든 사람 특히 어리석은 자들까지도 알아들을 수 있게 하고자 그가 갖고 있던 여러 한문서적에서 인용하고 적용하였다. 또는 그는 천주님의 모든 덕과 여러 가지 도리가 광범한데 여러 가지 책에 흩어져 있고 하나의 총록(總論)이 없기 때문에 읽는 사람이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여、여러 책에서 뽑아 모아 부문별로 분류해 한 책으로 만들어「성교전서」라 하여 후학에게 넘겨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1801년 순교로 말미암아 그는 저술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이 그 일을 이어받게 되었으니 즉 앵베르(Imbert) 주교의 지도 아래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는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이었으나 조선에 입국한 교구장으로는 첫 번째였다. 조선에 입국하자 그는 정약종을 자극했던 같은 정신으로 고무된 조선인 협력자들에게 둘러싸여 그의 교우들이 그들 고유의 말로 기도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입국한 지 1년이 못되어 벌써 그는 기도서 하나를 편찬하였으니 이것이「텬쥬셩교공과」이다.
이는 그가 한문서적들을 바탕으로 하여 직접 편집한 것이다. 앵베르 주교는 한문서적에서 암시를 받아 그 책을 편찬하였고 베르뇌(Berneux) 주교는 그것을 수정、감수하여 1862~64년간에 간행하였다.
또한 그는「텬쥬셩교 십이단」도 저술 하였는데 그것은「텬쥬셩교공과」에서 발췌한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또 박해로 모든 것이 폐허가 되었다. 앵베르 주교는 입국한 지 2년도 채 못되어 순교하였다. 조선교회는 다시 6년 동안 목자없는 교회로 남게 되었다.
앵베르 주교의 후임한 페레올(Ferreol) 주교는 다블뤼(daveluy) 선교사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동반하고 1845년 입국하였다. 그는 1853년 2월에 사망하였는데 이 해에 부주교인 매스트르(maistre) 신부는 로마에 보낸 연말보고서에서 출판물에 대해『한글로 쓰인 것으론 교리교과서인「성교요리문답」(1864) 사사성경강론집인「성경직히」、성인전인「쥬년첨례광익」준주성범、기도서 등 책들이 있음』을 보고하고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광범위한 저술활동은 조선의 첫 프랑스 선교사들이 역사에 그 이름을 남기지 않은 수많은 평신도들의 업적을 잘 증명하고 있다. 이들은 선교사들과 긴밀한 협조하게 조선 교우들에게 박해에 대비하기 위한 필요불가결의 영혼의 양식과 교리지식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정기적으로 일어난 박해들은 수많은 교우들은 희생시켰을 뿐 더러 기도서와 교리서까지 빼앗아 갔다. 많은 책들이 불길 속에 사라졌다. 그래서 우리는 그 중 많은 책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19세기 조선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인물 중의 하나인 다블뤼(Daveluy) 주교는 1845년에 조선에 입국하여 18757년 베르뇌(Berneux) 주교의 보좌주교로 성성되었다. 그는 조선에서 21년간 활동하였는데 21년 중 9년 동안은 보좌주교로서 22일 동안은 교구장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1845년 조선에 입국하자 마자 한문과 한글공부에 착수하여 10년 사이에 두 언어에 정통하게 된 것 같다. 그 때부터 그는 조선 순교자들의 역사、조선의 관습과 역사、기존 종교서적들의 수정과 검열、한문 종교서적의 번역 등 다양한 연구 분야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75년간의「조선사연표(朝鮮史年表)」를 작성하고「라한사전(羅韓辭典)」의 편찬을 마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최양업 신부는「연중주요기도서」를 번역하고、뿌르띠에(Pourthie) 신부는 조선의 식물、지질、동물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업적들은 유실되었다.
이상의 몇 가지 사실은 19세기 중엽 선교사들의 활기찬 활동정신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오세완
<神父ㆍ매스컴위원회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