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이 넘은 남자가 있었다. 그의 얘기인즉 길을 가다가 푹 쓰러져 죽을지도 모른다는 혈압공포(혈압이 높은 사람이 가끔 뇌촐혈로 죽었다는 얘기를 들어서 안다며), 또 자기가 죽게되면 자기의 어린 자녀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걱정과 불안,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성한 사람도 병을 만드는 곳이 병원이라는 말도 있어 지금껏 말로 포현할 수 없을 만큼의 마음의 고통이 있었지만 병원을 선뜻 찾아나서지 못했다고 했다.
얘기를 좀 더 자세히 들어보니 그는 아주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형님 밑에서 형의 눈치를 살피며 자란 불우한 과거가 있었고, 전술한 여러가지 불안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암에 갈린 형이 죽어가면서 환자에게『그동안 내 뒷바라지 하느라고 고생 많았다. 조카들을 부탁한다』는 말대신 임종하는 순간에『넌, 나빠!』하고 가슴에 못이 박히는 말을 남겼으며 그 이후 온갖 공포증에 시달리게 되었노라고 했다.
같이 온 그의 부인은 남편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으며 그렇다고 남편의 성격상 꾀병을 부릴 사람은 또 아니라고 했다.
살림살이가 넉넉한 편도 아니었으므로 여러가지로 생활이 위축되었다. 이 같은 경우『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냐. 혈압이 정상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다 잊어버려라. 그리고 열심히 살려고 노력해라. 배부른 걱정일랑 집어치우고…』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이렇게 남이 보기에는 하등 쓸데없는 걱정거리에 매달리지 않을 수없 는것이 이 병, 노이로제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혈압이 정상이라고 하면 의사도 사람이니 잘못 잴 수도 있고 혈압기가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며 다른 병원에 찾아가 다시 혈압을 측정하게 되고 걱정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시인 Hㆍ하이네가『인생은 병이요, 세계는 병원이다. 그리고 죽음이 우리들의 의사인 것이다』라고 했는데 그에게는 인생이 고해다. 그도 죽음을 누차 생각했지만 죽을 만한 용기도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치료자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치료받는 동안 부인과 함께 세례를 받고 성당에 열심히 나갔다. 그렇지만 죽음의 공포는 시시각각 그를 괴롭혀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랜 상담과 분석의 결과 그는 부모가 일찍 돌아가신 것을 부모가 자신을 버린 것으로 마음 속 깊숙한 곳(무의식)에서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러한 생각은 도덕적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생각이었으므로 그러한 생각(부모에 대한 원망, 분노)이 의식세계에 뛰쳐 나올려고 할 때 그가 느끼는 것은 그저 혈압공포 죽음공포 병원공포로 나타나고 있었다.
흔히 사람들이 심한 열병에 시달리면 우선 당장은 자신을 괴롭히는 그 열만 내릴려고 안간힘을 쓰듯이 그도 자신을 당장 괴롭히고 있는 공포증에만 매달리고 있을뿐 그 공포증이 갖는 의미는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런 뜻에서 상담이나 정신치료는 길고 긴 요나의 암행을 같이 해주는 작업이라고도 할수 있다.
고열에 시달릴 때는 항생제의 투여와 곁들여 열을 내리기 위해서 해열제를 병용 투여한다.
왜냐하면 그 열 때문에 탈진해서 죽을 수도 있고 치료가 엄청나게 지연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과에서 쓰는 항불안제나 항우울제도 마찬가지의 효과를 기대하고 쓴다. 정신분석치료에서는 약물을 쓰지않는 것이 원칙이나 불안이 너무 심해 상담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약물을 투여하며 상담과 약물치료를 병행해 나간다.
이 환자의 경우 형의 죽음은 그가 가지고 있어 왔던 오래된 문제에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겉으로는 죽은 형을 원망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나 그의 무의식세계에는 그런 말을 하고 간 형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한 적개심을 그가 이해하고 해결하지 않는 한 그는 끝없이 공포증에 시달릴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