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절제는 리치 신부에게 겨우 6십은전을 주어 조경에서 쫓아내려 하였다. 성당건립을 하는데 6백은전이 들었는데 6십은전을 주므로 리치 신부는 화가 나서 유절제가 주는 돈을 받지않고 마카오로 돌아가려 하였다.신총독이 서승을 그냥 쫓아낸다는 소문이 퍼시면 자신의 정치생명에도 영향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 사람을 보내어 리치 신부를 불러 왜 돈을 받지않고 갔느냐고 화를 내었다. 리치 신부는 귀화한 외국인을 범죄자
처럼 내쫓으므로 돈을 받을 수 없다고 하자 유절제는 자기 관할지역에 적당한 땅이 있으면 성당을 건립해도 좋다고 허락하자 리치 신부는 6십은전을 받았다.
중국대륙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루지에리 신부와 리치 신부가 천신만고 끝에 조경에 정착을 하게 되었는데 지방관이 바뀌어 쫓겨나게된 것이다. 중국에는 지방관이 3년에 한번씩 바뀌므로 또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일이므로 리치 신부는 황제에게 진곡을 하고 선교의 허락을 얻어야겠다고 결심을 굳히게 된다.
소주(韶州)로 가서 성당 부지를 8십은전을 주고 매입하였다. 소주의 주민들은 다행히 서양인을 그다지 싫어하지 않았다. 안토니오 데 알베이다(중국명麥安東)신부가 소주에 와서 리치 신부를 도와 선교하였다. 소주는 기후가 나빠서 학질이 많이 유행되어 어느 때는 소주 주민의 4분의 1이 학질에 걸릴 때도 있었으며 또한 사망율도 높았다. 더구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외국인은 더 위험하여 리치 신부와 알베이다 신부는 학질에 걸려 심하게 앓았다. 총독은 소주에 성당 신축을 정식으로 허가하였다. 리치 신부는 조경에서 성당을 서구식으로 건립한 것과는 반대로 소주에서는 성당을 중국식으로 건립하였다. 이유는 서구식으로 건립하여 유절제 총독에게 빼앗긴 이유도 있겠으나 중국인들이 제일 경계하는 포르투갈의 요새라는 오해를 받지않기 위해서였다. 1591녀 중국인 종명인(鐘鳴仁) 황명사(黃明沙) 두 청년이 소주에 와서 입회하였다.
알베이다 신부는 재차 학질에 걸려 일주간 정도 심한 고열이 나더니 위독하게 되어 리치 신부로부터 종부 성사와 고백성사를 받고 1591년 10월 17일 서세하였다. 알베이다 신부의 관은 삼목(杉木)으로 두께가 3촌 되게 짜고 중국식으로 관에 조각을 하고 광채나는 약을 발랐다. 리치 신부는 알베이다 신부의 유해를 성당에 안치하지않고 산에 매장하였다. 왜냐하면 중국인들은 사람의 유해를 집안에 안치하는 것을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고 싫어하기 때문이다.
중국인 구태소는 리치 신부에게 승복을 벗고 유생복을 착용 하도록 권유 하였다. 리치 신부는 주로 유생들을 많이 만나므로 승복은 오히려 선교의 장애가 되었다. 서구식 사제옷 착용은 중국법에 금지되어 있을 뿐만아니라 포르투갈인을 싫어하는 중국인들에게 한층 더 적의감을 갖게 할 것이다.
중국사회는 사(士) 농(農) 공상(工商) 불교의 승려 도교의 도승으로 분류할수 있었다. 리치신부가 승복을 벗는다면 이 신분층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 착용해야 하는데 유생의 옷을 입는다면 유생은 당연히 공자를 존중하는 표시가 되는 것이다. 리치 신부는 공자가 종교인이 아니고 교육가라고 판단하였다. 불교의 승복을 착용하는 것보다 유생복을 착용하는 것이 천주교에 더 접근하는 것이라 생각하였다.
유생복으로 개장한다해도 루지에리 신부가 처음에 승복을 채택하여 착용했고 순찰사 발이냐노 신부가 승복착용을 적극 지지하였기 때문이다. 리치 신부는 선교에 경험이 풍부한 장상의 결정을 바꾸기 난처하였다.
그동안 교회에 신자수도 적고 발전이 완만하였는데 다른 사람이 비평하기에 자신의 과실을 감경하려고 한다할수도 있고 10여년간 승복을 착용하여 겸손과 덕행을 쌓아왔는데 유생복을 착용함으로써 권위와 존영의 방법을 채택하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1592년 리치 신부는 유생복으로 개장할 것을 결심하고 발이냐노 신부에게 신청하였다.
발이냐노 신부는 개장문제를 신중히 검토하였다.
유생복으로 개장한다면 자색 비단에 남색 줄을 친 비단에 남색 줄을 친 비단 도포에 머리에는 흑색 관을 착용해야하므로 사치스런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알베이다 신부가 소주(韶州)에서 학질로 병사하였고 소주는 기후가 나빠 죽음의 함정으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리치 신부가 장차 중국의 북쪽으로 진출하여 성당을 건립하고 황제에게 진공을 하려면 승복을 착용하고는 어려울 것 같았다. 발이냐노 신부는 1594년 11월 개장을 정식으로 허락하였다. 1594년 가을부터 마태오 리치 신부와 라자로 카타네오(중국명 郭居靜)신부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하였다.
리치 신부는 1595년 늦봄 소주를 떠나 남경으로 갈때 유생복으로 개장하려고 하였다. 과거시험에 급제하거나 응시한 일이 없으므로 사인(士人)으로서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동생복(童生服)을 착용하였다. 리치 신부와 친분이 있는 관원과 유생들은 리치 신부가 유생복으로 개장한 것을 모두 좋아하고 환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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