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개학까지는 하루나 남아있기 때문인지 신학생같은 사람은 한사람도 눈에 띄지않았고 원효로 근처에 사는 교우들과 학교에서 일을 보는 사람들만 미사에 참례하기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황량한 교정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 두채 서 있었다. 하나는 신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는 예수성심신학교였고 뒷건물은 신학교 성당이었다.
내가 학교에 입학하기 훨씬 전에 지은 이 신학교는 한국에서 최초로 벽돌을 사용해 지은 역사깊은 건물이다. 이 신학교 뒤를 이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벽돌성당인 서울 약현(중림동)성당이 완공됐고 그후에 지금의 명동성당이 생겨났다.
나는 붉은 벽돌로 외부를 치장했고 사방에서 당시에 보기 드물었던 유리가 번쩍번쩍거리는 신학교의 모습을 보면서 첫눈에『아아! 참 훌륭하구나』라고 감탄했던것 같다. 점점 학생수가 늘어나게되자 내가 대신학교에서 공부할때 쯤인 1915년경에 대신학교를 따로 지었는데 그 전까지는 신학교에 건물이라곤 이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모두 성당으로 들어가길래 특별히 할일도 없고 혼자있기도 쑥스러워 나도 얼떨결에 그들 뒤를 따라 성당으로 들어갔다. 제대 뒤편에는 오주예수 성심상을 나타내는 그림이 걸려있었고 빨강·노랑색갈의 색유리도 눈에 띄었다. 당시 교장신부였던 빠리외방전교회 진보안(기낭) 신부가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마침 나보다 3년 먼저 신학교에 들어온 상급생을 우연히 만나 같이 조반을 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그선배와 한참 얘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하도 신비로와서 나는 그 소리를 따라가 보았다.그 소리는 한 상급생이 빈 공부방에서 열심히 타고 있던「풍금소리」였다. 그 상급생이 손을 왔다갔다하며 건반을 누르고 페달을 밟자 신기하게도 그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어떻게 저리 잘 탈 수 있을까』하고 내가 무척 궁금해하는 눈치가 보였던지 풍금을 타던 상급생이「도레미파솔라시도」부터 풍금을 다투는데 필요한「화음법」과 몇 가지 기본사항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나는 그 내용을 작은 쪽지에 하나도 빠뜨리지않고 적어놓고 나중에도 두고두고 그것을 보면서 풍금을 독학하곤 했다. 신학교에는 그 상급생 2명과 나밖에 없는데다 처음보는 풍금이 하도 신기해서 그날은 하루종일 풍금앞에 앉아 건반만 두들겨댔다.
지금도 15살 어린나이에 신학교에서 보낸 첫날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선명히 떠오르는 것은 역시 그 낡은 풍금이다.
내친김에 이 풍금과 관련된 얘기를 좀 더 해야겠다. 첫날부터 풍금소리에 너무 매료된 탓인지 소신학교에서 대신학교까지 신학교 생활 8년간 틈나는대로 꾸준히 화음법이 적힌 쪽지를 보며 열심히 풍금을 탔다.풍금에 대한 나의열의는 퍽대단한것이어서 때로는 그 열성이 과해 교장신부로부터 여러차례 따귀를 맞은 적이있을 정도였다.
당시 신학교에는「풍금쟁이」라고 불리며 풍금을 전담하는 신학생이있었는데 그사람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풍금을 타는 것이 금지돼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에 아랑곳하지않고 주일날이면 누가 알새라 몰래 그공부방으로 가서 뚱땅거리며 풍금을 탔다. 그러던 어느날 벌써부터 이를 알고있던 진교장신부가 더이상 참지못하고 내가 풍금을 치고 있는 공부방으로 달겨내려와 냅따 따귀를 후려갈기는 것이었다. 그후로도 이런일은 번번히 계속됐다.
그러나 나는『나중에 신부가 돼도 풍금을 알아야 신자들에게 찬가를 잘가르칠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신념을 꿋꿋이갖고「뺨을 맞거나 말거나」신경쓰지않고 꾸준히 풍금에 재미를 부쳐나갔다.
그래서 나중에는 혼자서 곡을 만들 수 있을정도로 실력을 갖출수 있었다. 이때 매를 맞으면서도 열심히 연마해둔 풍금실력덕분에 나중에 신부로활동할때는 혼자서노래말을쓰고 기존 성가곡을 다듬어서 혼배자들을위한 찬가집을 만들었고 이 찬가집은 지금은 침묵의 교회가 돼버린 덕원면속구에서까지사용됐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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