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위령의 날
사이호 센터하우스에서 하루밤을 묵은뒤 우리는 약 40명에게 성사를 주고 성당에서 여섯대의 미사를 드렸다. 공산군이 성당을 병원으로 사용했기에 병원냄새가 물씬했다. 우리는 다시 평양의 주요 본당인 성미카엘성당으로 돌아와서 수없이 몰려드는 옛교우들과 장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남포의 교리교사인 윤씨의 아들이 최근에 사제로 서품됐는데 이 윤신부님이 이곳에서 미사를 드렸다.
나는 1950년 10월 28일자의 일기속에 담을 내용을 무심히 넘긴듯하다. 우리가 서울에 떠나 평양으로 갈 때 케롤 신부의 스테이션웨곤에 한 승객이 있었는데 이분이 바로 최근 서울에서 사제직에 오른 윤신부였던것이다.신자들 가운데는 양유와 중강에서 요리사 일을 했던 마지아씨도 있었고 10월 29일자에 언급한 지물상 말딩씨의 아들 김요한도 나타났다.
요근래 어느날 케롤 신부와 나는 김말딩씨 댁에 초대를 받아 식사를 했다. 여늬때와 마찬가지로 집은 한건물에 딸린 가게 뒷편이었다. 가게는 완전히 닫혀 있었고 재고품에는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었다. 공급이 극히 소향이라고 했다. 공산치하에서 어떻게 장사를 계속할 수 있었느냐는 나의 물음에 말딩씨는 대답했다.『거래 총액이 약 2백엔인데 세금은 1백엔에 이르는 상황이 될 때까지도 장사를 계속 해볼려고 애썼지요. 그러나 굶어죽지 않으려면 문을 닫아야만 했습니다』상인의 이 말은 비슷한 상황에 있었던 어느 농사꾼으로부터 직접 들은 말로써 진실임이 입증됐다.
우리가 남에서 올라왔을 때「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의 방인 수녀들은 더이상 수녀원에서 지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수녀원은 공산군에 의해 징발되었고 자매들은 각자집으로 보내졌던 것이다. 케롤 신부와 내가 이곳에 왔다는 말이 퍼지기가 무섭게 제일 먼저 나타난 사람들 가운데 그들도 끼어있었다. 물론 그들은 모두 사복차림이었고 강마리아(베드로수녀)는 그들을 모두 자기 오빠네 집에 모아두었던 것이다. 오빠는 친절하게도 살방도를 마련해 주었다고 한다.
베드로 수녀는 공산당원들이 끝내는 수도원을 몰수하고 자매들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내는 명을 내릴 때 까지 공산치하에서 겪은 이 공동체의 경험을 우리에게 낱낱이 들려주었다. 공산군의 남침 당시 베드로 수녀와 아네따 수녀(아네따 수녀는 1941년 진주만 공격당시 영원한 도움의 수녀회의 장상이된 메리놀수녀이다)는 양유(Yen.gyou)의 북서쪽 어느 곳에 피신했다. 한달간이나 이질로 앓고있던 아네따 수녀는 극히 쇄약했고 병석에서 꼼짝도 못했다고 했다. 1950년 6월 24일 밤 11시경 4명의 공산군이 두 자매들이 기거하던 농가에 불쑥 나타나서 아네따 자매를 체포하고 자신에게는 따라오라고 명령했다는 것이다. 베드로 수녀는 그녀가 중병이고 또 허약하니 여행할 수 없다고 버텨보았으나 허사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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