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로 오는 사람은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에 유대아인들은 발끈하였다.
그들의 조상들도 광야에서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여 살린 모세에게 반기를 들었던 (출애 18장 2,7~8)것과 마찬가지이다.
여기서 요한이 유대아인들을 거론한 것은 특별한 뜻이 있어서이나 그들은 요한복음서에서 세례자 요한이 삐뚤어진 세상을 고발할 때 세례자 요한을 적대하는 무리로 처음 등장했고 그 후 사사건건 예수를 반대하는 무리로 등장한다.
그들은 조상들의 정통지도 이념을 따르지 않으면서 조상들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말로만 조상들을 들먹이는 사악한 무리이다. 그들은 예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며 트집을 잡고 끝내는 예수를 사형장으로 몰고 가는 무리들이다. 그들은 좋은 말을 하면 악하게 받아들이는 예수의 적대자들이다. 그들은 성도 예루살렘에 진을 치고 각 지방에 끄나불을 달고 있었다.
오늘 예수의 말씀에 불만을 품고 투덜대던 유대아인들은 아마도 갈릴레이의 유대아인들일 것이다. 그들은 예수의 신상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부모를 잘 알고 있었고, 요셉의 아들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 「요셉의 아들 예수」란 표현은 세속적인 눈에는 하찮은 신분이다.
그들의 불평은「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는 예수의 말과 그 신분과는 당치도 않게 맞지 않는다는 속셈이 깔려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악의적인 논리를 해명할 필요가 없었다. 요한은 이미 예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사자(使者)이시며、세상의 죄의 대가를 짊어지고 세상에 오신 어린양이심을 복음서에서 알렸다.
그러니 유대아들은 하찮은 출신의 예수일지라도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심을 깨달아야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아니라고 옹고집을 부리는 그들에게 아무리 논리적이고 풍부한 재료를 제공할지라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시(是)는 시로 받아들이고 비(非)는 비로 받아들이는 순진한 마음의 소유자만이 하느님의 관심을 끌 수 있다. 이런 사람이라야 하느님이 이끄시는 사람이며, 그 인도를 받아 예수께로 갈 수 있고 예수를 믿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 이끄신다는 표현은 요한복음서에서는 궁극적인 구원을 받는다는 뜻으로 구약성서 예레미야서에서『나는 너에게 변함없이 자비를 베풀었다』(31장 3)와 연결되어 있다. 이 귀절은 직역하면 「나는 너를 자비로 이끌었다」라는 말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 하실 때 『내가 이 세상을 떠나 높이 들리게 될 때에 모든 사람을 이끌어 나에게 오게할 것이다』(요한12, 32)라고 또다시 말씀하실 것이다.
예수께 오는 사람은 (믿는 사람은) 예수께서 그를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나게 할 것이다. 예수께로 오는 사람은 이사야 예언서에 예언되었듯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 그 제자가 된 사람들이며 하느님께로부터 온 예수께로 온 사람들은 예수 안에서 하느님과 만나게 된다.
하느님의 지복직관(至福直觀)은 아직은 예수님만이 체험한 신비이다.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다. 오직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리러 오셨고』(요한1,18) 그 분만이 하느님을 뵈었다. 모든 사람은 예수의 말씀을 들음으로써 하느님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예수께로 오며 그 사람은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될 것이다. 이 과정은 순수히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얻게 되는 은총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진정으로 다짐하신다. 믿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이 말씀은 예수님의 이번 연설의 라이트 모티브이다. 마치 음악의 한 악장에서 주제음악이 되풀이 되면서 그 악장을 아름답게 일관성있게 마무리 짓듯이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주제음이 또 다시 되풀이 될 것이다.
이 주제음을 강조하는 오늘 연설은 앞으로 있을 최후만찬을 준비하는 전주곡이기도 하다. 그 만찬석상에서 주께서는 빵을 손에 드시고 「이는 내몸이다」라는 영원양식의 말씀을 하실 것이다. 사실 「말씀이 사람(살)이 되셨다」라는 선언이나 「이 빵은 내 살이다」라고 하는 말은 논리적으로나 표현학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예수의 반대자들은 그 조상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실질적인 빵인 만나를 배불리 먹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소지가 충분히 있었다.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사람들은 죽었지만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언명하실 때 그들은 조상들이 하늘에서 은혜를 내려받은 것보다 더 큰 은혜를 감지했어야 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며, 이 빵은 곧 나의 살이다」「세상은 이 빵을 먹고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세상을 살리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통째로 내어주는 희생물이 될 예수의 속죄양적인 결의를 이해하려면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순진한 믿음이 있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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