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군이 공동체를 해산시킬 당시까지 덕원 수도원에서 베네딕또회 수도자로 있었던 한 청년의 인도를 받아 대전의 오신부님 그리고 우리와 함께 서울에서 온 윤신부님(새신부)-한국의 정확한 어법에 따르면 우리와 함께 내려왔다고 해야한다-등의 우리 일행은 진남포도로를 5마일 가량 차를 몰아서 북으로 가면 마산으로 들어서는 지점에 닿았다.
이길의 교차점에 평양공동묘지가 있다. 한 지역에서 우리 안내인이 무덤 3개를 가리키며 보니파시오 사우어주교(베네딕또회)루페르트클립사이즈 신부(베네딕또회) 그리고 한분의 베네딕또회 한국인 사제가 묻혀있는데 이분들은 모두 평양의 공산군 감옥에서 옥사했다고 한다. 사우어 주교는 지난 2월에 운명했는데 80세 고령이었다. 우리는 무덤들을 축복한 뒤에 위대한 이 영웅들의 영혼을 위해 잠시 기도를 드렸다.
부패한 시체에서 나오는 악취가 공산당의 학정으로 희생된 수많은 시체더미에서 풍겨나왔다. 그들 대부분은 계곡이나 도랑 끝에 세워두고 총을 쏴죽였다는 것이다. 탄환과 탄피가 아직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는 시신들을 꾹꾹 밟아서 도랑에 가득채운 뒤에 흙을 약간 덮어두었으므로 팔다리가 여기저기서 삐죽나온 광경은 참으로 목불인견이었으며 들개나 동네개들이 물고 끌고 다니는 것도 보였다. 우리들이 개를 쫓았으나 고용없었다. 우리가 떠날 즈음에 다시 모여들었으니까… 우리는 계속해서 진남포로 가는 도중에 레오 스위니 신부와 포스피칼 신부의 열렬한 활동무대인 한국본당을 찾았는데 꽤 양호한편이었다. 모든 성의와 제의성상등등이 공산치하에서 조심스럽게 감추어두었기 때문인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여기서 윤신부는 자신이 서품된 이후 처음으로 양친을 뵈었던 것이다.
나는 윤신부가 이곳에 남아서 부모를 위하여 미사한대라도 드디고 싶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상황이 불확실하고 간박했기에 오후까지 잠시 머물다가 평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 윤신부가 우리와 함께 돌아갈 결심을 내린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진남포는 아직 미군에 의해 완전히 점령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막 어두워질 때 평양으로 돌아왔다.
▲11월 4일 나는 187공수부대 군종신부인 샘슨중령과 부대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 부대는 미군 포로들을 끌고 퇴각하는 공산군을 섬멸하기 위해 순천근교에 투하됐다. 샘슨 신부는 어제갔던 묘지에 다시 갔다. 그러나 오전에 갔으면 더나을 뻔했다. 왜냐하면 일단의 「외국인 포로들 」이 공산군에 의해 어느 학교 건물에 감금되어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그 마을로 가는 원산쪽으로 차를 몰지 않을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마을 이름은 대성산이다. 시 동쪽의 간선도로를 따라 가다가 기림리를 막지나 오른쪽으로 휘어진 첫번째 갈림길에 도착했다. 이 방향으로 우리는 1마일 가량 계속가서 긴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니 왼쪽에는 작은 파출소가 있었는데 조금 더 가니까 왼편으로 샛길이 나있었다. 그곳에서 바라보니 언덕 아래 북쪽으로 흰 석회로 지은 학교건물 2채가 있었다. 큰길에서도 잘보였다. 이 학교는 대성산 마을 학교이다. 학교 건물을 둘러보니 책걸상은 없었고 바닥에는 짚이 깔려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일단의 외국인들이 한달 전에 공산군에게 끌려와서 억류되었으며 남자가 2백 1명이고 여자는 6명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8월 말경 내지 9월 초순경의 어느날 트럭에 실려 왔는데 밤이었던 것으로 기억해냈다.
주민들의 설명에 따르면 6명의 여자들은 성바오로회와 가르멜회수녀이고 남자들은 서울에서 공산군에게 포로가 되었던 버언주교ㆍ부쓰신부 및 프랑스 신부들이 확실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분들은 지난 여름에 끌려갔었으니까…(이 추측은 나중에 부쓰 신부가 귀향한 뒤에 입증됐다)학교내에는 최소한 2개의 건물이 있었다. 주민들은 여자들이 감금되었던 동쪽 건물과 남자들이 있었던 서쪽 건물을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학교 뒤쪽 언덕에는 우리가 어제 이야기했던 것과 비슷한 도랑이 있었는데 여기도 3개의 시체더미가 있었다. 그래도 이곳에는 흙을 제대로 덮어묻은 듯 했다. 이무덤들은 대동군 임원면 기암리 마을 서쪽에 있다.
이 마을의 공산당 두목 김장수는 지난 10월 31일에 미군 아니면 한국군 방첩부대의 포로가 되었다. 그는 여기 묻힌 희생자들의 신원을 알 수 있는 정보를 제공했다. 마을 주민들은 그들 대부분이 서울에서 나포된 남한의 공무원과 그 아내 및 가족들인 것으로 추측했다.
▲11월 5일 성미카엘 성당에서 아침 7시 미사를 드린뒤 나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2명을 지이프로사이호 근처의 어느 마을까지 모셔드렸다. 수녀님들은 내일 떠나기 위해 오후내내 집안을 치우기 시작했고 케롤 신부와 나는 덕원에 감춰둔 다른 물건과 사이호 도서실 책들을 찾아보았다. 이 군단에서 오후4시 미사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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