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장을 연상케하는 조그마한 무대 가운데 쯤에 「유니언 잭」이 그려져 있는 탁자가 있고 좀더 뒤쪽으로 허름한 가림막이 쳐져있다.
운동복 하의를 입고 맨발에다 상의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두 흑인들이 관객을 향해 소리친다.
『우린 깜둥입니다. 처음부터 당신들은 우릴 깜둥이라 불렀죠. 언제부턴가 우리도 깡둥이라고 줄리는 것에 익숙하기조차 했습니다.
우리가 깜둥이라고 불리는 것에 화를 내지 않는다고 우리 가슴속에 있는 뜨거운 피가 식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린 여전히 굶주림에 잠이 깨서 착취와 억압으로 하루를 보내고 다시 굶주림으로 잠이 드는 깜둥입니다』
서울대교구 제기동본당 청년연합회가 지난 2월 12일부터 14일까지 3회에 걸쳐 본당 유치원에서 공연한「바니 사이먼」작「일어나라 엘버트여!」의 첫장면이다. 남아연방의 고질적인 흑백인종차별을 예리하게 파헤친 이번 연극공연에는 평소 연극공연에는 평소 연극에 관심을 가진 본당 청년 및 학생 등 약 2백여명이 관람했다. 가끔 일간지의 해외토픽란에서 뉴스거리로만 치부해버린 흑백인종차별! 그러나 다시 부르짖는 절규에 관객들은 숙연해졌다.
『지금 우리집에는 백인들이 교묘하게 뿌려놓은 금욕과 이기심, 더러운 표양만이 남아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깜둥이들의 이야기가 아닌 바로 당신들! 당신들의 이야깁니다. 뒤를 보십시오! 뒤에서 당신 발목을 부여잡은 크다란…』
깜둥이들은 직업허가증이 있어야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남아연방의 요하네스버그 지역. 기타를 치며 가수생활을 하던 펄시가 직업허가증이 없다고 경찰에 연행되어 감옥에 끌려가는 장면. 「주님이 남아연방에 재립한다면…」이라는 이상한 풍문이 나라 전역에 퍼지고 박해에 시달리던 흑인들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장면. 재림한 주님을 핵미사일로 사살하는 장면 등 24개의 장면이 빠른 탬포로 진행되는 동안 두 배우는 40여명의 역할을 바꾸어가며 연기한다.
주님의 사살에 분노한 흑인들은 알버트거리로 모여 항의한다. 진압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펄시가 총에 맞아 쓰러지고 부상당한 봉기니는 펄시의 주검을 안고 울부짖는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엘버트여!』
공연이 끝났지만 한참동안 관객들은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들의 이야기인 것 같아요. 물론 이 땅엔 인종차별도 신분허가증도 없습니다. 그러나 자랑스런 선진조국, 복지사회도 아닙니다. 눈만 뜨면 소외와 가난,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는 수많은 노동자, 농민이 있지 않습니까』「펄시」역과 연출을 동시에 맡았던 문장순군(바오로ㆍ한양대)은 공연이 끝나자 흐르는 땀을 씻어며『배경은 다르지만 우리 나라 현실과 너무나 흡사해 관객들로부터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앞 「빈산」소극장에서 공연, 일반 젊은이들에게도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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