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만 하다보니 건축할 여유가 없었다』. 심각한 중국의 주택문제를 놓고 벌인 토론 끝에 중국인 스스로 내린 결론이었다. 여기서 혁명은 물론 「문화대혁명」을 의미하고 있다. 12억의 인구가 살아숨쉬는 거대한 대륙, 중국에 있어서 문화혁명이 남긴 흔적, 아니 상흔은 넓고도 깊은듯 했다.
76년. 10년간 중국대륙을 「초토화」시키다시피한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렸을때 사람들은 『중국의 인구가 엄청나게 줄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12억에 달하는 인구가 줄었다면 얼마나 줄었다는 얘기다. 이것이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중국최대의 오류」라고 생각하고 있는 「문화대혁명」을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예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중국취재기간 중 내가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문화혁명에 대해 「비판적 발언」으로 일관하는데 서슴이 없었다. 그렇게까지는 상상치 못했던 중국의 변화, 변화하고 있는 중국의 일면이었다.
중국은 고도 「서안」의 자유시장에서 만났던 한 여대생, 북경의 고궁박물관에서 인사를 나눈 신발공장의 근로자, 그리고 중국의 관리들조차 문화대혁명이 중국의 발전을 후퇴시킨 주범이며 중국인민들의 공동의 적이라는 사실을 주저함없이 증언했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 중국의 종이라 「대자보」만드는데 모두 사용됐지요. 연일 곳곳에 나붙는 대자보에는 인민의 적 ○○○을 때려잡자. 자산계급을 몰아내자는 내용이 전부였다고 기억됩니다』
우리의 안내를 맡았던 안내원이자 조선족이기도한 김○○씨(39세)는 『머리에 먹물이 조금 많이 들어있는 사람들, 소위 문화인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인민의 적으로 공격대상이 되었다』고 당시를 회상하면서 『문화혁명은 중국대륙의 악몽이었다』고 잘라 말했다.
「중국의 악몽」「중국 최대의 오류」로 중국인들에 의해 호되게 비판을 받고 있는 「문화대혁명」은 과연 어떤것인가, 변화하고 있는 중국, 변화할 수밖에 없는 중국을 이해하기위해선 문화대혁명의 실체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른바 「무산자 문화대혁명」(無産者文化大革命)으로 일컬어지는 문화혁명은 1966년 5월에 시작돼 1976년 모택동 사후 직전까지 10년간 계속된 중국 전대미문의 대사건이라 할 수있다. 모택동과 강청등 사인방(四人幇)의 시대, 문화혁명은 무산계급 즉 노동자의 천국을 표방하면서 자산계급을 제거하고 때려잡자는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지식인과 문화인, 그리고 자영사업가들을 때려잡으면서 중국대륙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대자보운동」이 시작된 것도 그즈음이었고 「홍위병」이란 이름으로 문혁의 선두에 뽑힌 학생들은 그들의 스승을 쓸모없는 적으로 몰아붙여 처단했다.
무정부 상태나 다름이 없었던 이 혼란은 「문혁」의 주체세력들이 해방군을 동원,「좌파」에 무기를 지급함으로써 총력전으로 발전, 중국은 「내전」상태나 다름없는 극한상황으로 치닫고 만다.
교만이 극에 달한 당시의 모택동은 「소천자」(小天子)로 행세했다고 중국인들은 말하고 있다. 제2의 서태후를 꿈꾸던 모택동의 처 강청에 의해 주은래가 비참한 최후를 맞고 유소기ㆍ등소평 등 중국 공산당 내부의 실력자이자 모택동의 동반자들은 실각과 위기를 거듭하게 된다.
상상보다도 훨씬 큰 대륙, 중국의 「문혁」은 그 거대한 땅덩어리 때문에 본래의 취지와 뜻에 비해 훨씬 변질된 모습으로 중국인민에게 전달됐다는 생각도 중국땅을 밟으면 실감으로 다가온다. 하부조직 즉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본래의 취지가 회석되고 변질된 「문혁」의 회오리바람은 중국의 그 거대한 땅덩어리와 정확한 숫자를 알수 없다는 인구 때문이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다는 얘기도있다.
인재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사이 자연재해가 3년간 이어졌고 국경문제 등으로 소련과의 사이가 악화되면서 소련으로부터 빌렸던 돈을 갚느라 전중국의 인민들은 허덕이고 또 허덕여야했다. 돼지죽을 먹고 살았던 시대가 바로 「문혁」의 시대였다고 그들은 말하고있다.
결국 10여년간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었으나 경제성장은 멈추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외부로부터의 고립 덕택에 중국의 인민들은 행복감속에 살수 있었다.
이세상 어느 인민들보다 「모택동 동지」덕분에 행복하게 살고있다고 믿었던 그 굳건한 믿음은 모택동의 죽음으로 깨어지고 만다. 전제군주의 알제에서부터 인민을 해방시켰다는 모택동. 인민의 아버지로 불리우던 모택동의 신화는 10억인구의 숨통을 죄고 「조자룡 헌칼 휘드르듯」중국 전역을 칼로 지배하던 사인방의 비극적 최후와 더불어 막을 내리게된다.
10년간에 걸쳐 진행된 「문혁」의 후유증은 「개방」이라는 전혀 다른 얼굴을 중국대륙으로부터 요구하게된다. 얼룩진 과거, 그 역사를 치유하기 위한 개혁과 개방은 그 역사의 오류를 비판하는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 당시 화국봉이 「문혁」의 과오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인물이 된다.
중국의 개혁은 처음「사천성」에서 개별농업으로 실시됐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개혁파의 승리는 농촌의 땅을 개인에게 부분적이나마 나누어주는 책임제를 도입하는 것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오늘, 책임농사, 자유농업의 결실은 만성적인 배고픔으로부터 인민을 해방시켜주는 것으로 드러났다. 먹고사는 문제의 해결은 12억인구의 중국으로서의 획기적인 변혁이 아닐 수 없었다.
10년전만해도 TV가 무엇인지도 몰랐다는 장춘의 조선인 김양은 『관광객들이 들고다니는 작은 녹음기가 너무나 신기했었다』고 웃었다. 개혁과 개방이라는 물줄기를 타고 흘러온 10년 세월은 중국의 배고픔을 쫓아버린 기간이었고 변화의 다음 단계를 중국인들은 크게 기대하고 있는듯 했다.
처음 지적한대로 「혁명만 하다보니 건축할 여유가 없었던」결과는 엄청난 주택난이라는 후유증으로 나타났다. 이는 개방으로 가는 오늘, 중국이 직면한 주요문제로 부각되고있다. 아직 대부분의 기업체를 국가가 운영하고 있는 상황도 개방에 뒤따라야할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요소, 친절과 서비스가 필요없는 국영 기업체의 특징은 열심과 노력 역시 불필요한 상황 속에서 중국이 풀어가야할 숙제로 지적되고 있다.
우리 일행도 북경의 호텔에서 미사봉헌을 위해 빌린 방문제로 책임자가 없으면 어떤일도 해결할 수 없는 중국의 벽 앞에 한없이 답답함을 느껴야만했다. 확실한 사실에 대해서조차 책임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시하려하는 현실에서 개방을 향해가는 중국의 고민을 읽을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중국의 고민이 아닐수도 있다. 만만디(천천히)를 앞세운 중국, 중국인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고 있는 자연스런 「전술」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40여년의 단절을 뒤로하고 아직 어색하기는 하지만 다시 손을 맞잡으려 시도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간과할수 없는 부분이라는 생각도 든다. 다급한쪽은 사회주의를 고수하면서 자유경제체제를 도입, 인민의 복지향상을 꿈꾸고 있는 중국자신이다.
화해의 시대에 걸맞게 북방외교를 최우선에 두고있는 우리역시 급하긴 마찬가지일수도 있다. 지구상에 남아있는 단하나의 분단국가로서의 낙인을 빨리 벗어보려는 조급함과 내적갈등의 문제들은 대(對)북방정책으로 희석시켜보려는 우리의 현실이 조급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중국은 보다 급한 상황에 직면해 있음을 읽어야할 것이다. 개방의 흐름을 그대로 타 내려가기 위해선 다음 단계로의 발전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교정상화를 목표로 하고있는 우리가 대 중국관계에 있어 우선 버려야 할 것은 「조급함」이라고 많은 이들은 진단하고 있다. 이는 제대로 중국을 여행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려야할 결론이기도 하다.
문화대혁명의 악몽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해온 중국은 그 「문혁」의 최고 책임자였던 모택동을 중화인민공화국의 개국영웅으로 여전히 떠받들고있다. 중국을 계속적인 연구대상으로 삼아야한다는 주장도 여기에 기인하는 부분이 있다. 「문혁」을 주도해온 핵심인물이긴 하지만 모택동을 부정하는 것은 곧 중국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고 우리의 안내자는 설명했다. 「문혁」이라는 회오리바람이 중국을 휩쓸고 있는동안 중국의 모든 종교들도 모진 수난과 수모를 겪어야했다.
공산화이후 「애국회」와 「지하교회」의 모습으로 남아있던 중국의 천주교회는 애국회 지하교회 할 것없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든 종교활동을 「싹쓸이」로 제거해버리겠다는 정책 아닌 정책으로 가혹한 박해속에 있던 중국 천주교회、문화혁명으로부터의 탈출을 향한 여러 시도 속에서 중국의 천주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개방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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