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초기교회가 중국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음은 우리가 널리 알고있는 사실이다. 오늘날도 그 관계는 이어져오고 있다.
차제에 본지는 현재 자유중국 대중(臺中)교구에서 사용중인 통신교리를 입수, 연재함으로써 예비신자들과 독자들에게 도움을 드리고자 한다.
이 통신교리는 총36권으로 돼있는데 이번호부터 제1권「인생의 수수께끼」를 연재하고 월간 빛잡지 부록으로 단행본을 발간할 예정이다.
이 통신교리는 대구대교구 한중천주교친선협회(지도·이판석신부)에서 자료와 번역을 제공했다.
사람의 지혜는 전능한가?
사람의 지혜는 얼마나 위대합니까. 우리눈에 와닿는 모든 것을 사람의 지혜의 걸작이 아닌 것이 어디있습니까. 만생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일 작은것인 바늘과 실에서 큰것에는 우주를 탐험하는 복잡하고 정밀하고 정확한 기계까지, 심지어 문명의 보고인 거대한 저작 및 인문 수학 의학 예술 음악등 각방면의 위대한 성취는 인류의 지혜로운 결정이 아닙니까. 사람은 이렇게 믿기어려운 지혜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자신에대한 이해는 모자랍니다. 심중의 근본 문제의 해결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으로 하여금 의혹을 지니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상하다고 느낄수 없습니다. 왜냐면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사람은 생활에 필요한 물질이외에 제일근본적인 어려운 과제가 바로 감정적이고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면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생명의 가치와 목적입니다. 아울러 이들 문제는 사람의 힘으로, 지혜로선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럼 故 蔣統의 현재물질문명과 정신생활의 평가에 대해 쓴 글귀를 인용해봅시다.
「근래의 과학은 더욱 발달하고 물질문명은 갈수록 앞서가고 있으나 반대로 도덕은 갈수록 곤두박질치고 있으며 정신 생활도 빈곤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심 공허를 느끼고 더욱 인생의 묘연함과 공포로 몸둘곳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생명의 의미를 모르고 생활의 목적을 모르는것입니다. 이렇게 생명의 의미와 생활의 목적이 없는 사람은 오로지 알게 모르게 허무하게 일생을 보냅니다. 이러사람이 나라에 동포에 세계인류에게 도대체 어떤 도움이 될수 있겠습니까.
왜 오늘날 세계 인심이 이렇게 묘연하고 두려운상태로 되었습니까? 왜 갈수록 더욱심합니까? 유일한 원인은 바로 내심적인 공허를 메울수 없기때문입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유망청년과학자 몇 명이있는데 그들의 과학은 이미 성취를 이뤘습니다. 그리고 큰 발명도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와 친구들한테 쓴편지는 항상 내심적인 공허를 느끼고 의지할곳이 없다했습니다. 이는 바로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정신은 더욱 빈곤해진다는 하나의 사실인것입니다」(「荒漢甘泉」蔣公證道詞(三)에서 채택).
도피할 수 없는 문제
연령이 많고 적고 직업이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고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을써서 깊게 생각을 한다면 반드시 아래와 같은 사람으로하여금 두렵고 또한 자기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문제들을 만날것입니다.
난 어디서 왔는가? 나의 생명은 어떤의미가 있는가? 나의 생명이 끝나고 나면 또 어떻게 되는가? 확실하게 나자신한테 말한다면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없을것입니다.
그리고 아마 어떤 사람들은 『그럭저럭 지낼뿐이죠. 나는 근본적으로 그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생명은 누리는것이외에 또 어떤 의미를 말할수 있겠습니까?』이런류의 사람은 매우 얄팍한 사람인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문제의 근본을 깊이 연구하기를 두려워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그들의 사상을 완전히 TV·신문·잡지 및 환경의 지배로 단 한 목적인 즉 물질적인것만 추구하는것입니다. 마치 기계가 영혼이 없는것처럼 말입니다. 심지어 왜 이세상에 사는지 근본적으로 마음에 두지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여정속에 아직도 하나의 「최후단계」가 있다는걸 모르는체 할 뿐입니다.
이들 문제에 있어 우린 정말 그냥 내버려 두고 혹은 도외시 해야만 되겠습니까? 이는 유람차를 탄것과 같습니다. 기사가 고의로 험난한 길로 몰고 가는것과도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물어봅니다.
『당신은 차를 어디로 몰고갑니까?』
『어디로 몰고 가던 무슨 상관입니까? 공기가 좋고 경치가 아름다우면 됐지 목적지가 뭐그리 중요합니까?』기사는 어떤 관심도 없는듯 대답했습니다.
『설마 당신은 이길이 막다른 길인줄 모르는 것은 아니겠죠. 듣기엔 이길앞엔 절벽이 있다던데요!』
『거기에 가서 다시 말합시다!』
이는 얼마나 어리석고 책임없는 기사입니까! 그 누가 그의 행위에 동의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실제생활속에 우리가 유지 하고 있는 태도는 아마도 이런 미친 기사와 다를바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바쁘게 생활해 가며 뒷일에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마치 모든 것이 무덤웅덩이에서 멈춰버린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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