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6일 서울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나는 아침 8시 30분에 지이프와 트레일터를 몰고 남으로 향하던 길에 치숍 신부의 옛본당인 중화(Junghoa)에 잠시 멈췄다. 성당과 집은 서있었지만 피해는 많았다.
또 사리원 성당도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건물만은 서 있었다. 오후 5시 10분에 서울에 도착했다. 나는 정장을 하고 있는 크레그 신부와 코피 신부를 만났고 8군 사령부에서 셰리 신부와 하루밤을 지냈다.
▲11월 7일 북쪽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노주교님을 방문했다. 그리고 장루도비꼬에게 내가 그의 동생 아녜따 수녀의 운명에 대해 들은 것을 전해드렸다. 오후 4시 30분에 기지창에 도착함.
▲11월 8일 507 통신대에서 부대장에게 빌린 트렌치 코우트를 돌려드린후 나는 임신부와 이신부(옹진)을 서울로 가는 군용버스에 태우고 인천 근방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갔다. 이곳에서 나는 종교 예식을 위해 수용소를 방문코자 하는 인천교구 사제들과 프로테스탄트 목사들을 수용소로 수송하는 문제를 두고 담당장교인 메이어즈 소령과 협의했다.
수용소 정문에서 막나가려할즈음 나는 전에 서울 대성당 성가대원이었던 젊은 한국여성 2명을 만났다. 그들은 일자리를 찾고있다는게 드러났다. 그래서 나는 기지병원의 군목인 질린스키 신부를 만나 부탁했더니 신부를 만나 부탁했더니 신부님은 병원내에서 일자리를 찾을수 있을거라며 나를 안심시켜주셨다.
▲11월 9일 나는 나의 서정리 옛성당을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보려고 차를 몰았다. 그곳에 도착해보니 전교사인 김분도와 그 아내 세실리아자매는 공산당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인근 해창마을에서 경찰로부터 고초를 겪고 있음을 알았다.
신자들의 말에 따르면 분도씨의 아들이 35세이던 외인인데 그가 공산당원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라 한다. 내가 해창으로 달려가보니 분도씨는 자기 아내가 이미 평택감옥으로 이감되었다고 말하는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그와 함께 해창서로 가서 담판을 했다. 그리하여 나는 분도와 세실리아자매의 성분조사에서 긍정적인 조서를 얻었다.
▲11월 10일 서정리 옛성당에서 미사를 드린후 나는 공산군이 떠난뒤에 관리인 김요셉이 자루 속에 담아둔 잡동사니들을 고르는데 하루를 보냈다 여기서 나는 몇 개의 낡은 원고뭉치와 찢어진 책들 그리고 십자가 및 작은 자명종을 찾아냈다.
그 지서에서 나는 공산당에게 협력했던 어느 지방 의사가 준 타이프라이터를 보았다. 내가 지난 6월 28일 부산으로 떠날 때 그곳에 남겨둔 물건값은 대충 3천 5백불정도가 되었다.
▲11월 11일 미사를 드리고 아침을 먹은 뒤에 나는 엉망진창인 잡동사니를 계속 고른후 해창 전교사 김분도씨를 데리고 평택으로 갔다. 우리는 수용소 영창에서 분도씨의 아내 세실리아 자매를 만나보고 우리들이 석방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며 그녀를 위로했다. 군차량 호송 작업이 완전히 끝난 뒤에야 우리는 국도를 따라 기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육중한 탱크와 트럭들이 뿌옇게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했는데 우리는 자동차가 일으키는 먼지 사이를 뚫고 천천히 달렸다.
거의 모든 다리가 폭파되었으므로 물을 건널 때에는 일렬로 흩어서서 상대편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임시 통로를 거쳐 진흙투성이인 맞은 편 뚝으로 기어 올라갔다. 4륜차들만이 특히 지이프의 튼튼히 보았다. 때로는 수렁에 빠진 탱크들 때문에 시간을 더 잡아먹기가 일쑤였다. 피곤한 여행이었다. 우리는 마침내 오후 4시 30분에 기지에 당도하여 기뻤다.
우리가 제3병참 사령부에서 귀환보고를 하고 올라와보니 원산의 10군단과 합류하라는 명령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설며을 곁들이면 이명령은 도꾜 극동사령부의 총사령관이 내린명에 따른 으로 지난 9월로 거슬러올라간다. 우리는 10군단에 배속되었는데 이 단은 제1해병사단과 제3, 제7보병사단으로 편성됐다. 우리는 10월 5일까지 안양의 제7사단과 함께 있다가 7사단이 원산이 있는 동해안으로 이동준비를 시작할 때 제3병참사령부로 임시 전보되었다. 이 사령관의 명에 따라 우리는 평양을 향해 북으로 여행했고 그럴 즈음에 10군단의 3개 사단은 해로를 이용하여 원산으로 이동했으며 우리는 지금 원산에서 1연단과 합류해야 한다.
▲11월 12일 병참기지가 가까운 성 바오로 수녀원 성당에서 아침 7시 미사를 드렸다. 아침 10시에 김포공항으로 가서 원산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에드워드 클리어리 신부(공군 군종신부 테네시의 내쉬빌출신)를 위해 기지 성당에서 몇몇 교우에게 고해성사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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