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천주교회의 역사는 제1기 천주교의 수용·실천기(1785년 이전) 제2기 천주교 박해기(1785~1886) 제3기 전교자유기(1886년 이후)등으로 크게 구분될 수 있다.
그 중 제1기 이전까지는 그 역사의 중심지가 근기지방에 국한돼 있었으나, 제2기 이후부터는 여타의 지방으로 교세가 확대되어 감으로써 이 천주교 전파가 전국적인 정치·사회문제로 비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에 있어서의 천주교회사 연구는 여전히 초기지역에 한정되어 왔으며 일반적으로 부각되어 있는 문제만을 고찰하는데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천주교회사의 연구는 조선후기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선행돼야 할 문제의 하나이며 따라서 그 사회전체 상황에 근접한 사건을 다루는 것이 좀 더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역사의 흐름에 있어 보다 근본적인 면-즉 박해기에 있어 각 지방전파의 형태나 고유한 성격의 문제를 도의시한 연구는 결국 피상적인 결론을 얻는데 그치게 될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각 지방의 천주교회사를 연구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이고, 이를 토대로 조선천주교회사의 흐름을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고는 바로 이러한 연구의 일환으로 박해기에 있어 천주교가 영남지방에 전파된 시기와 확대과정을 고찰하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초기 영남천주교회의 성격을 분석하며, 아울러 그 전파에 대한 향촌사회의 인식형태를 구명해보고자 하는데 있다.
천주교의 영남전파 과정
영남지방은 성리학과 사림의 본고장으로서 의리와 주자가례에 뿌리깊어 이질문화의 접근을 용납치않는 지방으로 이해되어 왔다.
조선후기 사회에 유입된 천주교가 근기지방의 남인들에게는 많은 호응을 얻으면서도 영남지방의 남인들에게는 유포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도 이러한 영남지방의 특성과 결코 무관하지만은 않았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영남지방이 초창기의 천주교 전파와 관련이 없었으므로 천주교 박해가 시작됨과 더불어 이곳은 천주교신자들에게 새로운 은거지요 피난차로서 인식되기에 충분하였다.
천주교와 영남지방이 간접적으로나마 연관을 맺기 시작한 사실은 성호 이익의제자 용은 홍유한 (1726~1785)이 천주교를 이해하고 소백산 아래 (현 경북 영주군 단산면 구구리)로 이거하여 그 교리를 실천하고자 한데서 찾아 볼 수 있다.
영남지방에 천주교를 전파하고자 노력한 최초의 사람은 황사영(1775~1801)이었다.
그가 양근의 정씨집안과 혼인함으로써 천주교에 입교한 후인 정조 17년(1793)에 상주의 향리 이복운(1776~1802)을 방문하고 천주교를 전파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이 결국은 실패에 그치고 말았지만, 천주교에 심취하게된 황사영이 상주까지 찾아가 교리를 전파하고자한 사실은 천주교 영남전파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영남에 천주교가 실질적으로 전파되는 것은 1790년대 후반부터였다. 1971년 신해박해의진 원지인 전라도와 이웃한 충청도의 신자들이 계속된 박해의 위험을 느껴 동요하게 되고, 이에 그들이 새로운 은거지로 인식하였던 영남북부의 산간지방으로 이주하게된 것이었다.
교세의 확대화 그 형태
영남북부에 이주한 신자들은 두차례의 박해를 겪고나서 남부지방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영남 남부에 천주교 신자들이 이주해있던 기록은 1827년말과 1838년초에 이르러 나타났는데, 1836년 조선에 입국한 모방(Maubant)과 샤스탕(Chastant)신부 등이 이듬해부터 이 지역에 전교한 사실이 그것이다. 이 사실은 곧 영남의 남부에도 공소가 형성된 것을 의미할 뿐만아니라 그 집단부락을 중심으로 천주교 전파의 폭을 넓히게된 사실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영남지방의 신자집단이 다시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1850년초에 이르러서이며 다블뤼(Dsv. eluy)주교, 페롱(Feron), 칼레(Calais)신부 등이 전교활동을 함으로써 최남단 지역에도 신자집단이 형성되고 예비 신자만도 1천여명에 이를 정도로 교세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1866년에 전국적으로 시작된 병인박해로 영남지방에서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으니, 기록에 나타난것만도 북부의 대구 5명, 상주 19명, 남부의 진영 1명, 진주 2명, 동래 9명, 울산 3명, 거제 1명 등 모두 40명에 이른다.
천주교 영남전파의 성격
영남 북부에서 있은 초기의 박해들은 천주교 전파와 관련된 사실 이외에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앞의 박해과정에서 그 행적이 비교적 자세한 22명의 신자들을 분석해보면 첫째로 그들 대부분이 충청도 출신으로서 박해를 피해 영남지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이들이 토착민들에게 전교활동을 폈을지라도 아직 토착민들은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실천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즉시 배교하게 되었던 것이라 하겠다.
둘째로 그들의 신부구성을 보면 양반 8명, 예산의 명임가문이 1명, 중인 2명이다. 이들은 초창기 조선 천주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교리를 배운 사람들로 특히 이주신자들의 집단을 인도하거나 토착민들에게 교리를 전파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볼 때 영남의 초기 신자집단은 여러 신분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그중 학식이나 교리에 밝았을 중인층이 상의 신자들이 집단생활을 주도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천주교의 교세가 영남지방에 확대되어 나간 것은 향촌사회의 토착민들이 점차 천주교리에 호감을 갖게 된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랜 향촌사회의 질서와 가치체계 속에 젖어있던 초착민들의 대(對) 천주교 인식은 대부분 적대적인 것이었다.
특히 묵암 김치진의 「척사론」과 향리 이명구의 「유불양3교설」등에서와 같이 지식인들의 천주교 배척양상은 시기에 따라 점차 구체적이고 강한 성향을 띠게 되었다.
즉 영남 지식인들은 천주교 전파 초기에는 단순히 사학(邪學)으로서의 천주교를 배척하는 입장을 취했지만, 교세의 확대와 더불어 이질적 가치체계로서의 천주교를 비판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이 1866년 서양세력의 위협이 있은 후로 더욱 완강해지는 경향으로 변모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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