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빵」설교를 듣고 청중이 어떻게 반응했는가라는 문제를 돌이켜보는 것은 오늘의 대목을 알아듣는데 도움을 준다. 생명의 빵 설교는 두가지 내용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라는 부분이고(35~50) 또 하나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성체성사 예고대목이다(50~59).
첫째 부분에서 청중 중에서 반대자들은 유대아인들이라고 밝혔고 그들은 예수께서 하늘에서 왔다는 말에 반대의사를 표명하였고, 둘째 대목에서는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보고 먹으라는 말이냐」라고 분개 하였다. 이 불평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이 정녕 하느님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이라는 것과 당신 자식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셨다.
오늘 대목에서도 예수의 말씀에 대한 불평으로 시작된다.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이 말씀을 듣고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하고 수군거렸다』이 공동번역은 잘못된 번역이다. 「이 말씀은 듣기가 거북하다」라는 뜻이다.
먼저 「제자들 중 여럿」은 물론 12제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그 동안 예수의 기적과 말씀에 감동되어 예수를 따라다니던 군중의 일부를 가리킨다. 예수의 갈릴래아 전교활동이 끝나가면서 예수의 반대자들이 유대아인들에게서 예수를 따라다니던 사람들에게로, 그리고 심지어는 12제자 중에도 나타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듣기가 거북하다는 그 말씀은 어느 말씀을 두고 한 말일까.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는 말씀일 수도 있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라』는 말씀일 수도있다. 학자들은 첫번째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야 62절의 말씀:『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예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하늘에서 내려 온 빵이라는 말이 받아들이기가 어려우면 내가 하늘에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뜻이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영적인 것이며 생명 그자체이다. 영성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에 대한 가르침이 깊이 있게 취급되고 있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의 차이는 생명과 죽음의 차이이며、불멸과 사멸의 차이이다. 육적인 것은 썩어없어지는 것을 본성으로 하고 영적인 것은 영원한 생명을 본성으로 한다. 그래서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조상들이, 지금은 사람들이 먹고도 죽은 빵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빵으로 되는 묘리는 오직 믿는 사람에게만 구원의 진리로서 마음에 와닿는다. 그런데 예수를 세속적인 안목으로만 흠모하며 따라다니던 제자들 중에는 이 묘리를 깨닫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무릇 사람들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세가지 영역에서 살고 있고 그 어느 영역을 주된 영역으로 사느냐에 따라 그 인생가치가 결정된다. 우선은 감각영역에서 살고 있다. 감각영역의 생활은 물질을 대상으로 한다. 물질을 위주로 감각적인 생활만 하는 것은 사멸의 운명을 향하여 산다는 말이 된다. 그야 말로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둘째 영역은 지성적인 영역의 생활이다. 이 영역의 대상은 학문、연구생활등 지식을 학문, 연구생활등 지식을 추구하여 정신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다. 지식과 정신적인 생활은 물질위주의 생활보다는 영속성이 있다. 그러니 물질적인 생활보다는 훨씬 고귀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과 정신생활은 역시 한계가 있다. 영원하다고 할 수가 없다. 정신생활도 육체적 조건을 떠나서는 영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생활의 셋째 영역은 성스러운 영역이다. 보통사람인 우리들은 성스러운 영역이 나에게도 있는가 하고 의아해 할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에게 성스러운 영역이 있다. 악마의 눈에도 눈물은 있다는 말과 같이 아무리 악을 일삼는 사람이라고 부분적으로 또는 순간적으로 거룩한 감정이 솟구칠 때가 있다. 다만 그 거룩함이 한시적이고 제한되어 있다는데 문제가 있다. 요는 우리가 어떻게 영원한 것을 향하여 사는가에 우리의 성스러움을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감각생활이라도 물질위주가 아닌 영성위주의 생활에 노력하는데서 성스러움을 확신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영성생활은 우리의 생활이 영원한 생명을 도모하는 생활이냐에 그 진로가 달려있다. 이러한 뜻에서 예수께서 당신이 주는 하늘의 빵을 먹고 영원한 삶을 도모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영원한 생명소는 사람이 자기 재주로 버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신 사람이 아니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뜻에서 하신 말씀이다.
영원한 삶을 사람들에게 주시기 위하여 당신의 몸을 몽땅 내놓는 구제행위를 설파하는 예수님의 마음은 극진한 사랑에 대한 배반을 직감하고 마음이 아팠다. 다른 사람이 아닌 12제자들중 한 사람이 당신을 배반할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배반자 유다스는 돈주머니에 마음을 두고 예수의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서 얼쩡거렸던데서 사고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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