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양심은 쉽게 공존할 수 없고 늘 충돌하고 긴장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사회가 안정되지 않고, 국가나 정부가 권위를 상실할 때 더욱 그렇다. 법의 횡포와 양심수의 증가는 이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그러나 법과 양심은 서로 다른 둘이 아니고 하나의 양면이라고 보아야 한다. 참된 법과 바른양심은 충돌할 수 없고 또 충돌해서도 안된다. 둘은 다 하느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이다.
이미 보아온 바와 같이 인간의 법은 자연법에 그 근원과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하며 자연법은 창조주의 뜻이다. 그리고 양심은 하느님이 각 개인에게 넣어주신 능력이고 법이며 인간은 이 능력을 통해서 인간답게 살수 있고 하느님을 닮은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법과 양심이 충돌하고 갈등을 갖는 것은 인간들이 하느님의 뜻인 자연의 질서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느님께 반역한 것이 기본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 결과가 바로 자연 질서의 혼란이며 갈등이다.
법이란 법은 모두 잘 살기 위한 규범이고 양성은 인간이 바로 살 수 있도록 개인에게 주어진 능력이다. 조화와 질서、평화와 생명이 깃들던 에덴동산에는 한 가지 법 즉 삶의 길 밖에 없었다.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기2,16~17)『너는 아내의 말에 넘어가 따먹지 말라고 내가 일찌기 일러둔 나무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창세기3, 17~18).
인간은 누구나 성장하면서 선과 악이 어떤 것인지 배운다. 이 배우는 과정의 스승은 윤리법이다. 그리고 인간은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곧 양심의 작용이다. 윤리법과 양심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일치한다. 그리하여 무엇이 선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합당한 지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 성장하면서 삶의 길, 바른 길을 즉 양심의 소리를 어겨보지 않은 사람도 거의 없다. 불행하게도 인간은 법을 어겨 행동하면서 성장하고 악을 알게 된다. 즉 이론적이고 의식으로 알고 있는 악과 잘못을 통해 깨닫게 되는 악은 아주 다르다. 인간은 선을 거스려 행동하면서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체험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 갈등과 대결을 체험한다(로마7,7~25) 그러므로 실제로는 법과 양심의 대결이나 긴장관계라고 하기 보다는 선과 악의 대결로 보아야 한다.
바르지 않은 법을 양심은 거절하고 개인의 옳지 못한 판단과 행동을 법은 제재한다. 바르지 못한 지식에 근거한 양심은 무지나 편견에 의지하고 있는 것이므로 시정되거나 깨우쳐야 한다. 「악법도 법」이란 법 위주의 논리는 비도덕적이고 실증법 위주의 발상으로 19세기에 성행했던 사상으로 극복되어야 하며, 자기 양심만을 내세워 공익과 공선을 거부하고 해치는 독선과 아집도 개인주의적 사상으로 극복되어야할 정신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법과 양심은 다같이 선을 지향하며 잘못될 때 서로 견제하고 수정하며 보다 성숙한 단계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아야한다.
법은 양심에 의해 늘 수호되고 개정, 보완되어야한다
법의 본 모습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어 모르는 사람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잘못하는 사람에게 빛을 벗어나야 한다(로마2,17~21) 법은 스스로 이일을 할 수 없으며 하느님을 닮은 인간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것이 인류역사 안에서 선각자와 선현들의 역할이었고 구세사에 있어서 예언자들의 역할에 속한다.
스승들의 스승이며 예언자 중 예언자이며 모든 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 안에 그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마태5,17~19). 그 많은 법들을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환원하여 주셨다.
법들은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므로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면 모든법이 완성되는 것이다(1요한 4,7~21:로마 13,8~10 참조) 그러면 법조문에 의존하여 인간을 법에 예속시키지 않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처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기본정신과 자유와 품위를 누릴 것이다. 이때 법은 완성되는 것이며 양심에게는 자유를 준다. (요한 8,31~32)
양심은 법을 통해 공익과 공선을 위해 자제와 봉사 정신을 배워 자유를 누리도록 해야.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따라 생활하시었으므로 늘 자유로우셨다.(요한 5,30~40:8,28~36)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당신을 완전히 내맡기셨으므로 온전한 자유를 얻으셨다. 이와같은 삶을 본받은 사도 바울로도 자유인이었다. 그 무엇도 그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었으며(로마 8,31~39)삶과 죽음을 초월할 수 있었다(필립 1,20~21)그러한 그의 삶은 양심의 자유를 옳게 사용한데 있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해방의 자유는 예수님처럼 인간에 대한 사랑과 봉사에 있음을 시사한다. 『누구나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해서 다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자유가 있다」고 말할 수 있지만 모든것이 다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1고린10,23~24)
이러한 태도와 생활을 금하는 법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법과 양심이 서로 충돌하거나 반목하지 않을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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