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몇가지 일로 충분하게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받고있다고 보여집니다. 빈궁, 재난 혹은 학대에 의해서가 아니라 왜 태어났는지, 왜 고통받는지, 왜 죽는지 이해하지 못해서입니다.
물론 우리 일생의 노력의 성과는 이 세상에 남겨둘 것입니다.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한 모든 행동은 후손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의 피와 땀은 후손들에게 반드시 이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걸 마치고 죽음에 직면했을 때 이런 갈망은 묘연해집니다. 우리가 이런 짧은 생명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만족할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은 이미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의 고통스런 신음에서 어려움을 겪었던 일생을 돌이켜 볼때 그 묘연한 바램은 우리를 보상할 수 있겠습니까? 확실히 죽음은 수시로 우릴 위협하고, 즐거움에 두터운 구름을 씌우는 것입니다. 더우기 우리의 생활이 즐거울수록, 죽음에 직면했을때 더욱 슬픔을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은 『우리는 도대체 누굴위해 수고하고 누굴위해 바쁘게 사는가?』라고 자문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자녀를 위해서, 심지어 다음 다음 세대를 위해서 이겠지』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일생을 뛰어다니고 풍전등화의 입장이 됐을 때, 만약 자녀가 불효를 저지르며 노인네가 말많고 누를 끼치고 완고하다는 등으로 구박했을 때 그 누가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 심지어 인생의 목적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회의를 느낄 것입니다. 그래서 원한을 품게 되고 생명을 저주하게 됩니다.
생명의 격류 속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주여-우리의 자비로운 아버지-설마 우리로 하여금 이렇게 아무런 의미도 없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생활을 하게 하실것입니까? 독자 여러분 인내를 가지고 계속 읽어 내려 가십시오. 반드시 문제의 답을 찾을 것입니다.
생명은 마치 출렁이는 격류와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생명의 급류 속에서 각자의 배를 타고 파도에 출렁이며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금방 태어난 영아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 생명의 급류속에선 끊이지 않고 암초가 출현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배 심지어 우리의 부모, 형제자매, 친구, 이웃이 탄 배, 가 한척 한척 뒤집혀 침몰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는 비록 이 물위에 표류하고 있으나 언젠가는…아마 바로 내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역시 급류 속에 파묻혀 버릴 것입니다.
저 많은 사람을 보십시오. 눈앞의 생활에만 급급하고 생명의 종점조차 상관하지 않는것이 나로 하여금 어느 대학교수의 조우를 생각나게 합니다. 어느날 그는 어부에게 해만을 건너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날 날씨는 매우 나빴습니다. 그러나 교수의 간절한 부탁으로 어부는 어쩔수 없이 허락을 했습니다.
어부가 노를 저을때 교수는 물었습니다.
『어이! 철학을 아시오?』
『조금도 모릅니다』
『천문(天文)을 아시오?』
『말조차 들어 본적이 없는 걸요!』
『아예 모릅니다』
『어허이!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당신은 목숨은 반이나 잃어 버린 것이나 꼭 같군요!』
『아마도 그렇겠죠!』어부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배가 중간쯤 도달해서 갑자기 폭풍이 일어났습니다. 파도는 미친듯이 배의 한쪽을 마구 때려 아주 위험하게 됐습니다. 교수는 이번 항해를 후회하며 두손으로 배의 양쪽을 꼭 잡았습니다.
어부는 태연하게 물었습니다
『교수 나으리, 당신은 수영을 할줄 압니까?』
『전혀 모릅니다』
『배는 곧 뒤집어 질거고 단지 바다에 뛰어들어 목숨을 구하는수 밖에 없습니다. 당신은 수영을 할 줄 모르잖습니까 비록 아는게 많으나 절반의 목숨도 유지 할 수 없겠구려!』
이 이야기가 반영하는 뜻은 매우 깊습니다. 우리는 비록 학문, 금전, 세력, 지위, 명예 등이 있으나 모든것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제일 중요한 문제를 충분히 해결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왔는가? 또 어디로 가는가? 난왜 고통을 받는가? 죽음뒤에 또 어떤가? 생명? 얼마나 어려운 문제들입니까.
오묘한 사망(죽음)
죽음에 직면하고 있는 것이 인생 최대의 수수께끼입니다. 사람은 고통과 육체가 차츰 쇠약해져 몸부림 치는 것 뿐만은 아닙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자기가 영원히 소실되고 형이 없어져 버린다는데에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자신을 완벽화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절대적인 실패에 대해 깊은 통절을 표시하며 여전히 사람 마음에서 정확한 영감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인성속엔 순수한 물질에 속하는 영생의 씨앗은 있을수 없고 죽음에서부터 대항하는 데에서 일어납니다. 기술은 많은 것을 만들고 비록 유익을 주나 사람 마음의 걱정은 갈아앉일수 없습니다. 오늘날 생물학은 끝없는 수확을 성취를 했으나 사람 마음에 소멸할수 없는 영생의 기대를 만족할수 없습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