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실한 천주교신자였던 안중근 도마가 1909년 9월 만주 하얼삔 역두에서 당시의 조선통감 이토오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은 국제여론을 널리 일으켜 유럽의 신문들도 그 사실을 크게 보도했다. 그 사실을 크게보도했다. 그런데 영국 가톨릭의 유명한 신문인 「타블레트」(Tablet)지는 이 사건과 관련해 그것을 배후에서 조종한 사람이 누구였던가를 시사하는 듯한 예상 밖의 이상한 기사를 실었다.
로마 특파원의 통신이라고 전제한 그 기사의 요지는 이러했다. 조선통감으로서 이토오의 주요한 경력중 하나는 조선의 모든 선교사들을 다른 선교사들로 대체해줄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교황청에 보낸 것이다. 그 까닭인 즉 그는 조선의 선교사들이 그들의 신자들에게 러시아에 대해서는 호감을, 일본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갖도록 가르치고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바티깐에서는 이토오의 그와 같은 고발을 입증하도록 동경 정부에 요구하는 동시에 조선교구장에게는 이토오의 선교사 추방 계획을 알게되면 조선교우들이 이토오의 그와 같은 학정에 대해 소요을 일으킬지 모르니 그런일이 없도록 사전에 온갖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교황청의 요구에 대한 일본의 회신은 모호하고 만족한 것이 못되었다. 왜냐하면 동경 정부에서는 이토오의 고발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있지 않았으며 또 조선의 행정은 완전히 이토오의 권한이고, 또 선교사에 관한 그러한 조처는 조선의 평화를 회복시키기 위한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라는 등으로 대답해 왔기 때문이다.
이토오는 바티깐이 자신과 견해를 같이하지 않으려는 것을 알게되자 직접 교황을 찾아가 설명하기로 결심했다.
교황 레오 13세는 과연 이토오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교황을 대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교황에게서 찾는 매력을 이토오도 받았을 것이다. 알현을 마치고 나오면서 이토오는 『참 놀라운 지혜를 가지신 분이다. 그분은 조선의 비참한 사정을 나보다 더 잘알고 있다 일급 외교관이다』고 하면서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후로 조선의 선교사들을 대체하는 것이 문제시되지 않았다.
과연 이토오 조선 통감이 확신하고 있었던 것처럼 조선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에서 러시아를 지지하고 일본을 반대하는 이른바「親露排日」노선을 취하고 있었고 또 그렇게 조선 교우들을 가르쳤던 것일까?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를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었던 때였으므로 하나를 지지하면 하나는 반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당시 조선 선교사들이 일본을 지지하지 않았을 것은 충분히 납득이간다. 그러나 러시아를 지지했다는 것은 1860년대에 베르뇌(Berneux,張)주교가 러시아를 믿지 않았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좀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주지하는 바와같이 1965년경 대원군은 베르뇌주교에게 만일 러시아를 물리쳐 준다면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겠다는 제의를 해왔었다. 이에 대해 베르뇌 주교는 『조선에 유익한 몸이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나의 국가와 종교가 러시아의 국가나 종교와 같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하등의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말로 거절했었고, 또 거절하게 된 배경을 그의 집주인인 홍봉주(洪鳳周)에게 러시아는 재물을 탐내고 여색을 즐기며, 처음에는 고역한다고 하지만 결국 침범할 우려가 없지않고, 또 러시아와 조약을 맺는다 할지라도 해를 받을 것이 틀림없으며, 만일 프랑스와 먼저 조약을 맺는다면 그런 염려는 없을 것이라는 등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홍봉주는 비록 실패는 했지만 프랑스와 동맹을 맺도록 남종삼(南鍾三)과 함께 정부에 건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에 대한 선교들의 이러한 적대적인 태도는 1880년 대에 들어서면서 변화가 시작했다.
그것은 프랑스가 보불(普佛)전쟁에서 독일에 패전한 후 독일의 재침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러시아와 동맹을 협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 대한 프랑스 정부의 이와 같은 정책전환은 벌써 주한 러시아공사가 아직 부임하지 않은 프랑스 공사의 사무를 대행하여 교회의 요청을 중재해결하는 등 조선에서도 그 결과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1891년노불(露佛)동맹이 기정사실이 되자 조선선교사들의 親露노선은 더욱 확고해졌고, 또 그것은 미구에 러시아 세력에 의지해 점차 노골화해 가는 일본침략의 위협에서 조선의 국권을 수호하려는 운동으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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