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꼬복음 14장과 15장에 나오는 예수의 최후 이야기는 교회 초창기의 감동적인 내용으로 최후만찬에서부터 장례때까지의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사건들 중 두드러진 사례 몇가지를 간단히 소개하겠다.
「최후만찬」은 글자 그대로 마지막 저녁식사이다. 오늘날 학자들은 이때의 저녁식사가 서기 30년 4월 6일 목요일로, 장소는 예루살렘 서쪽의 언덕 시온산위의 어느 2층집 다락방으로 추측하고 있다.
최후만찬은 어느 식사와는 달리 성대한 식사였다. 일종의 연회로서 그때 예수께서 하신 행동과 말씀이 있는데 그분의 행적에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식사를 시작할 때와 마칠 때의 예수의 행적은 유대인 가장의 행동을 그대로 따랐으나 설명어(말씀)가 독특하다. 당신의 비참한 죽음을 예상하고 헛되지 않게 피를 쏟겠다는 결의를 표명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최후만찬 분위기는 무척 비감했을 것이다. 빵을 나누어주시면서 예수께서 의도하신 뜻은 매우 간단하다. 내가 빵을 나누어주듯 내 몸을 모두 바치겠다는 각오를 나타내신 것이다.
이 최후의 만찬 말씀을 듣고 서기 30년 오순절 5월경 예루살렘에 집결한 사도들이 예식으로 만든 것이 오늘날 미사이다. 1세기 신도들은 1주일에 한번씩 주간 예식으로 주님의 날은 예수 부활의 날인 일요일이었으나 이스라엘에서는 우리의 일요일과는 달리 일볼에서부터 일몰까지 즉토요일 저녁 7시경부터 일요일 저녁 7경까지가 주일이다.
최후만찬을 종교예식으로 만든 신도들이 1주일 내내 일하고 토요일 밤 최후만찬에 참석하는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리스도인이 볼 때 그리스도 사건보다 더 큰 사건은 없기 때문에 예수의 비참한 최후를 1주일에 한번씩 잊지말고 기억하자고 모인 그들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함께 식사를 하고 예수의 말씀을 되새기면서 그분을 만난다고 생각했다.
빵을 받아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그들은 단순히 음식·음료수를 마시는 것이 아니었다. 음식이 우리의 자양분이되듯 예수가 우리의 영양분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음식없이 살 수 없듯이 예수없이 살아갈 수 없다는 심정이었다.
미사란 그리스도 사건을 회상하는 축제요, 현존하는 예수를 모시는 축제요, 장차오실 그리스도를 학수고대하는 축제로 한 마디로 예수축제이다.
이렇게 최후만찬 후 예수께서는 시온산 언덕을 내려와 게쎄마니 숲속으로 가 기도를 바쳤다. 『아빠 아빠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뜻대로가 아니라 아빠께서 뜻하는대로 하소서』라는 짧막한 이 기도문은 청원의 성격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은 「아버지시여」「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시여」라고 부르지 않고 단순히 「아빠」라고 부른다. 어린아기가 처음 배우는 두 낱말중 하나이다.
서독의 유명한 여아킴 예레미아스목사는 한평생 「아빠」연구만 했다. 예수 이전과 예수시대·이후로 구분, 「아빠」용법을 연구했다.
이스라엘에서는 감히 하느님을 아기의 말인 「아빠」라고 부르지 않았다. 불경스럽다는 이유때문이다. 오직 예수만이 하느님을 이렇게 불렀다. 얼마나 하느님을 가까이 느끼고 정답게 느꼈으면 「아빠」란 말을 그대로 사용했을까. 전능하신 아빠께 한가지 청을 하겠다고.
기도중에 나오는 「잔」이라는 낱말은 그 속에 무엇이 담겼느냐에 따라 행운의 잔도 되고, 불행의 잔도 된다. 여기서는 불행, 죽음의 잔이니까 치워달라, 죽지않게 해달라는 뜻이다. 이 기도부분은 우리와 다를바없는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무당의 기복 신앙과 다를바없다. 그러나 다음의 단서가 매우 중요하다. 『제 뜻이 아니고 아빠뜻대로 해달라』는 이 부분은 무당에게서 전혀들어볼수 없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게쎄마니에서 이렇게 기도하다가 예수께서는 대제관이 보낸 경비병에게 체포돼 대제관집에서 30년 4월 6일 목요일 밤부터 다음 날인 금요일 아침까지 종교재판을 받은후 총독부로 압송돼 정치재판을 받아 사형언도·집행령까지 받는다.
마르꼬복음 15장 33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골로타에 낮 12시에 도착, 오후 3시 죽을때까지 3시간동안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십자가에서 예수는 예수님 나라말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죽으셨다. 이스라엘은 지극한 곤경에 처했을 때 시편 22편인 이 기도를 바친다.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렸을 때 그를 환호하던 백성들은 온데간데 없고 제자들도 그를 배반했다. 그의 임종현장에는 그의 편에 섰던 사람은 아무도 없고 로마군인·유태교인이 있었다. 한많은 생에를 마치는 임종순간에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인자·메시아로·주님으로 받드는 이는 없었다. 완전 절망과 파주일 뿐이다. 예수사건이 이렇게 골고타에서 막을 내리면 정말 무의미할 뿐이다. 신앙이 싹틀 여지가 없다. 그런데도 오늘날 예수사건은 계속되고 있다. 바로 부활신앙때문에 기독교인이 탄생하고 교회가 태어났다. 예수사건은 막을 내린것이 아니고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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