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우리가 여기에 있으니 좋습니다』(마태 17, 4참조). 이렇게 여러분과 더불어 있으니, 그래서 여러분과 더불어 이 경이로운 예식에 참례하니 과연 좋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침 이곳에는 세상의 굶주리는 이들도 우리와 함께 있는 것으로 생각합시다. 바로 오늘, 우리가 기아에 관한 심포지움을 열고 있는 바로 오늘, 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생각하도록 합시다. 그런 사람들은 수천명이 될 것입니다. 아마도 이 강당에 모여있는 우리들 모두보다도 더 많을 것입니다. 그들을 알아보도록 합시다. 연약하고 말라빠진 그들의 육신을, 애타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봅시다. 그들이 구걸하고 있는 소리를 들어보도록 합시다. 혹은 잦아드는 연약한 음성으로, 혹은 몸서리치는 침묵으로, 『우리에게 빵을 주시오. …우리가 죽어가고 있으니 빵을 주시오!』하면서 손을 내밀어 애걸하는 소리를 들읍시다.
그리고 가령, 우리가 「성체성사와 기아」라는 문제에 관한 우리의 토의들을 마치고 이 강당을 떠날 때, 이들 죽어가고 있는 무리들을 헤치고 지나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해 봅시다. 이때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성체성사는 생명의 빵이다』하고 주장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라는 것이다. (요한 10, 10)』하신 그 주님을 선포하노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들 굶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이 지금 여기서 실지로 우리 눈앞에 있든, 아니면 혹은 캘컷타의 길거리에, 혹은 사헬이나 방글라데쉬의 농촌지역 등 온 세상에 두루 흩어져 있든, 신은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들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불의는 그것이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 꼭 같은 일인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서 일어나고 있든 이곳에 있는 우리들은 이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할 우리의 몫이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체성사에서 우리가 받아모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느날 우리들에게 이렇게 물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굶주렸을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더냐 내가 목마를 때에 너희가 마실것을 주었더냐?… 내가 엄숙히 말하거니와, 너희가 이들 내형제들 중의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라도이일을 게을리했다면 그것은 곧 나에게 그일을 게을리한 것이다』(마태25, 31-46)라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책임이 있습니다. 모두가 관계가 있습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예수께서는 소리없는 사람들의 소리가 되십니다. 권력없는 이들, 압제받는 이들 가난한 이들, 굶주린 이들을 대변하시고 있습니다. 사실로 예수께서는 그들을 대신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일 그들이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막고 있다면, 그것은 그분의 소리도 듣지않고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기를 거절한다면 성 야고보가 매우 분명히 말해주고있는 그대로 우리의 신앙은 참으로 죽은 신앙일 것입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에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다고 합시다. 그럴 경우 여러분 중 어떤 사람이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편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으라고 말만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에 행동이 따르지 않으면 그런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곱2, 15-17)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정직하게 생각합시다. 오늘 아침 이곳에 있는 우리들은 대개가 잘먹고 있습니다. 또 상당히 편안한 환경 속에 살고있습니다. 이기적인 부자들이 마땅히 받아야할 것이라고 성 야고보가 말한 저주를 우리들은 받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자비를 베풀어주시기를 빌고 싶습니다.
이런 이기적인 부자들이란 개인이나 국가를 막론하고 굶주리는 이들에게 빵을 주거나 가련한 이들의 처지를 향상 시켜주기를 거절하는 그런자들인 것입니다.
『당신들에게 닥쳐올 비참한 일들을 생각하고 울며 통곡하십시오…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리며 지냈고 도살 당할 날을 눈앞에 두고도 마음에 욕심만을 채웠습니다. 당신들은 죄없는사람들을 단죄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들을 대항하지 않았습니다』(야곱5, 1·5~6)
제 2차 바티깐공의회가 우리의 현대세계를 두고 다음과 같은 부끄러운 논평을 한지 10년이 더 지났습니다. 즉, 『일찌기 인류가 오늘날과 같이 풍부하게 부와 자원과 경제력을 누려본 적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세계인구의 막대한 부분이 기아의 빈곤으로 신음하고 있다』(사목헌장 4항)고 했던 것입니다.
2년전에 국제연합 식량협의회는 이 「막대한 부분」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의 비율을 이루고있는가를 좀더 정확히 밝혔습니다. <1976년 필라델피아 성체대회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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