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고기 미역국」을 물리도록 먹었다는 얘기를 지난호에서 털어 놓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학교 사정이 항상 풍요롭고 넉넉했던 것은 아니었다. 신학생들을 먹여살릴 수가 없어서 신학교 존립 문제까지도 심각히 고민할 정도로 어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세계 열강이 맞부딛쳐 1914년부터 1918년까지 4년동안 치열하게 싸웠던 「제 1차 세계대전」의 여파는 신학교에도 심각하게 밀려왔던 것이다.
불란서가 독일에게 계속 밀리게 되자 한국에 나와있던 불란서 신부들이 종군신부로 소집을 받아 속속본국으로 귀환했다. 이것만해도 커다란 인적 손실인데다가 전쟁이 점점 그강도를 더해가게 되니까 이번에는 직접적인 식량문제가 학교에도 들이닥쳤다.
「불란서가 망한다」「출전 신부들이 죽었다」는 소문에 마음을 졸이면서도 우리들은 마음을 굳게 먹고 「콩나물 죽」을 먹으면서 사제성소를 지켜나갔다. 상황이 갈수록 어려워지니까 학교 신부님들은 미국 메리놀회 총장 신부에게 「신학생양성 후원회원」을 모집해달라는 편지를 띄웠다.
「신학생들이 콩나물죽을 먹으며 버티고 있다」「학교가 문을 닫을 상황」이라는 말이 퍽 절실하게 들렸던지 메리놀회 총장이 한국에 직접나와 시찰을 하고 후원회원 모집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신학생들은 후원회원을 한 사람씩 갖게 되었다. 나 역시 성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요한나」라는 미국인 부인에게 후원회비를 받아 나머지 신학교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꺽일뻔 했던 사제의 꿈이 「콩나물 죽」이 다리가 된 「바다건너 나눔」으로 되살아난 것이었다. 이 극적인 일을 생각해보면 「주님의 은총」이라는말 이외에 달리 더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이렇게 주위의 사랑과 격려에 힘입어 대망의 사제서품을 받은 날이 1926년 6월 23일. 성신강림주일을 맞아 파이프 오르간 소기라 장중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열린 「사제서품식」은 내 인생중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었다.
『황해도 산골에서 올라온 떠꺼머리 15세 소년이 사제가 된다』… 내 마음 속에는 정다웠던 동창생들과 교정과의 아쉬운 이별보다 그토록 염원하던 사제직에 첫발을 내디딘다는 설레임이 큰 기쁨으로 밀려왔다.
나를 신학교에 보내셨고 또 우리 학교의 교수신부였던 김아류스 신부는 마치 자신이 서품받은 것처럼 기뻐했다.
마침 한국 신부들이 일주일간의 피정을 마치고 오는 날이라 김아류스 신부는 『당신이 신학교 보낸 사람이 신부가 됐으니 한턱 크게 써야한다』는 성화에 못이겨 모든 신부들에게 「삐루」술파티를 벌였다. 요새 맥주를 당시에는 삐루라고 불렀는데 그날은 모두가 취할 정도로 비싼 삐루를 양껏 먹을수 있었고 나도 얼큰할 정도로 많이 마셨다.
김신부 이외에도 어머니와 여동생이 서품식에 참석했다. 아버님이 몇해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외아들의 서품식을 혼자 맞는 어머니의 마음은 특별히 각별했을 것 같다. 「명주」「목화」등 길쌈에 능하고 음식솜씨가 뛰어나 온동네에 소문이 자자했던 어머니는 나의 서품은 무척이나 대견해하셨다. 그날은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인천 「월미도」로 가서 바다구경도 하고 그토록 어머니를 고생시키던 「치아」도 치료해 드렸다. 이가 아파서 무척 고생하셨던 어머니가 치료를 받고는 얼마나 개운해 하시던지….
지금은 다시 볼 수 없는 어머님에게 그나마 작은 효도라도 해드릴 수 있었던 것이 퍽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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