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 평신도 신학은 있는가? 또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파고들면서 연구하는 이른바「평신도 신학자」는 있는가? 평신도 신학자의 불모지인 이 땅에서 그것도 20년 전부터 평신도 신학에 뜻을 세우고 연구해온 양한모(梁漢模ㆍ70ㆍ아우구스띠노) 회장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평신도 신학자로 손꼽히고 있다.
그의 유일한 현재 직함은 크리스찬사상연구소장이다. 크리스찬사상연구소는 1972년 9월 그가 서울대교구 기관으로 설립, 지금까지 자택을 사무실로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번듯한 사무실도 없고 직원조차 없는 연구소이지만 이 연구소는 설립 당시 공산주의 사상을 연구하고 그에 대처하기 위한 가톨릭사상연구소로 출범, 가톨릭문화강좌ㆍ성서강좌 등을 주도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왔다.
이 연구소는 80년대 들어 공식행사를 주관하고 있지는 않지만 설립목적에 따라 양 회장은 독자적으로 공산주의연구를 통한 통일사목 방안제시 및 평신도 신학연구의 산실로 이용하고 있다.
『교회에 들어와 정말로 마음의 평화를 찾았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비참한 과정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정치와 사업에서 손을 끊고 교회활동에 몰입하면서「평범하게 살자」는 신조로 일관하여 왔습니다. 자식들에게 원한 것 역시 드러나지 않는 삶, 평범한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삶을 유독 강조하는 그의 삶은 결코 유독 강조하는 그의 삶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데서 오는 갖은 고초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겪어야만 하였던 비참한 과정이란 철없던 어린 나이인 16세에 공산주의 이론에 매료되어 공산당에 정식 가입하면서부터 비롯되었다.
1921년 7월 9일 황해도 봉산군에서 출생한 양 회장은 어린시절 일제하 일본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작인들에 대한 갖은 확대를 직접 목격하면서 반일감정을 싹틔어왔었다.
고향에서 소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이주 제2고보(경복중학) 2학년 때 그의 운명적인 공산주의와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독서광이었던 그는 과학적 사회주의 입문서라 할 수 있는 엥겔스의「공상에서 과학으로」라는 책을 중학교 2학년 때 밤을 새워가며 읽은 후 공산주의 이론서를 탐독하게 되면서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공산당 가입 후 그는 독립문정면에「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정책반대, 조선독립 만세」라는 구호를 내붙였다가 투옥당하는 등 학교에서 요주의 인물로 등장하였다.
1940년 일제의 치안유지법으로 투옥되어 2년간 부산 형무소에서 복역한 그는 일본 경찰에게 취조를 받는 자리에서 해방을 맞이할 정도로 일제하에서 항일투사 애국투사였다.
그러나 그는 해방 후 공산당에 적을 두고는 있었으나 경성사범대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학업에 열중하였으나 1947년 당으로부터 복귀하라는 지령을 받고 서울 용산과 마포를 합친 용마구 당부 선전부책으로 임명된 후 1949년 1월 서울시당 부위원장직을 맡아 중앙당의 명령에 따라 우리민족사에서 가장 끔찍했을 뻔한「9월 폭동」의 총책을 맡았다.
당에 복귀한 후 진실한 민족해방 인간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민족성을 말살하고 인간을 학살하는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에 번민하고 괴로워하다가 마음속으로 전향에 뜻을 두고 있던 차에「9월 폭동」의 D데이인 9월 20일 나흘 전 9월 16일 체포되자 9월 20일 서울 시당간부회에서 집단 전향하였다.
전향한 후 1950년 치안국경감으로 임명돼 남로당 정치고문 김삼룡과 이주하, 당시 상류사회를 주름잡았던 여간첩 김수임을 체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북로당의 중국계 공산당인 성시백을 체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함으로써 남한에서 공산당을 척결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후 그는 정계와 재계에 잠시 몸을 담지만 이내 그만두고 천주교에 귀의, 신학대학을 다니며 자신의 죄과를 참회하기 시작했다. 오랜 침묵과 속죄의 나날 속에서 마침내 천주교 서울교구기관으로 설립된 크리스찬사상연구소 소장으로 72년부터 지금까지 개인의 신앙생활과 더불어 복음선교로서의 통일을 위한 방법 제시에 고심하고 있다. 양 회장의 일생은 대강 이렇게 요약된다.
결국 그 시대 민족 수난의 과정이기도 한 그의 비참한 과정은 1949년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후 1968년 가톨릭에 귀의함으로써 종지부를 찍고 치유받기에 이른 것이다.
전향 후 그는 치안국 경감을 잠시 지낸 후 태양신문 발행ㆍ편집ㆍ인쇄인(1951) 세계통신사 부사장(1953) 평화신문사 부사장(1958), 대한증권협회 부회장(1962), 가톨릭출판사 부사장(1971)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이력은 유난히 부책임자 역할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그의 공산당 경력때문이었다. 언론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 온 그는 실질적인 운영권자이면서도 전력때문에 감춰져 지내야만 하였다. 그의 옛날 사진이 제대로 없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그의 새로운 인생의 출발을 그의 전향에서보다 신앙입문에 두고있다.
『교회에 들어옴으로써 비로소 마음의 평화를 찾았다』고 입버릇처럼 되내이는 그의 고백은 손안에 있던 권력과 재물에까지도 과감히 멀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위안이었다.
장면 박사를 도와 제2공화국 민주당정권 수립에 깊숙히 관여한 양 회장은 장 박사의 입교권유에 직접적인 응답은 없었으나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공산주의에서 전향한 사람은 정치활동을 해서는 안되며 비정치적인 입장에서 공산주의의 그릇된 점을 냉철하게 지속적으로 구명해 나아가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그는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마음만 먹었으면 할 수 있었던 국회의원도 고위관리직 등 권력도 포기하였고 영세입교 후에는 재물에 대한 욕심도 버릴수 있었다.
『1968년 6월 3일 장면 박사의 대상(大祥) 전날 영세했습니다. 그분 살아생전에 영세하였다면 하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성심여고에 다니던 큰딸아이가 나보다 먼저 영세했을 때 그렇게 기뻐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교리를 가르쳐주고 세례를 주신 가톨릭대학장 정의채 신부님에게 큰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세입교는 장면 박사의 권면에서 비롯되어 1962년 5ㆍ16 군사정권에 의해 옥살이를 하고 나온후 영세입교한 고(故)현 석호씨와 가까이 지내면서 구체화되어 당시 가톨릭대학교수 정의채 신부의「지성인 교리반」을 수료, 결실을 맺었다.
현석호씨는 그의 영세대부가 되어주었고 그해 조직된 서울대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등 교회단체활동에 참여한 것을 비롯 현석호씨가 88년 12월 2일 작고하기까지 일생동안 신앙의 협조자, 동반자로 지내왔다.
현석호씨가 고령의 나이에 제2차 바티깐공의회 문헌해석집 (일어판) 번역에 착수하자, 마무리 짓지 못하고 타계하면 이를 이어받기로 약조할 정도로 깊은 사이였다.
양회장이 입교 후 신학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공산주의자였으며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는 것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는 그가 영세입교한 1968년도는 제2차 바티깐공의회 폐막 후 3년이 지난, 말하자면 공의회 정신의 구현이 본격화되는 시점이었다.
그 결과 공의회 이전에는 상상하지도 못하였던 신학교 수업이 신자들에게도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영세 후 3년만인 1971년 가톨릭대학 신학부에 청강생으로 등록한 양 회장은 1975년까지 만 5년동안 신학교의 전 교과과정을 이수하였다. 초창기에는 사업을 하면서도 주28시간 수업을 받을 정도로 열성을 다하였다.
『신학공부도 유익하였지만 교수신부님들과 수많은 신학생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하여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고 회고하는 양 회장은 당시 함께 수학하였던 신학생들이 이제는 중견사제로서 일선사목의 몫을 담당하고 있음을 지켜보는 것도 큰 기쁨과 자랑으로 삼고 있다.
양 회장의 진면목은 신학교 공부를 마친 후 저술한「신도론」「2백주년을 생각한다-오늘의 신도는 누구인가」「교회와 공산주의」「신도-하찮은 존재인가」「민족통일과 한국천주교회」등의 저서는 평신도 신학의 이정표로서 높게 평가받을 만한 값어치를 지니고있다.
『신학자가 아니라 신학도에 불과하다』고 그는 겸손해하지만 영세입교후 20여년동안 꾸준히 신학공부를 하면서 신도론과 통일사목 이론을 개척하고 정립한 여러 권의 저서는 그를 한국교회의「평신도 신학자」로 부르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도시교회는 너무 물질에 젖어있습니다. 물질에 탐닉하는 것은 곧 부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90년대 교회의 세속화 경향을 우려하는 양 회장은 한국 교회 공동체 전체의「영성의 빈곤」에서 그 이유를 찾고있다. 따라서 양 회장은 90년대 한국교회는 공동체의 영성심화를 통한 세속화 경향으로부터의 과감한 탈피, 그리고 전례의 토착화, 통일사목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제시하고 있다.
양 회장은 80년대 한국교회 3대 행사인 조선교구설정 1백50주년(1981년)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1984년) 제44차 세계성체대회(1989) 에 깊숙이 참여하였으며, 특히 조선교구설정 1백50주년 기념행사에는 기획분과 위원장으로서 총괄지휘한바 있다. 이 행사는 교회행사에 평신도가 주인의식을 갖고 주도한 최초의 행사라는데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일치위원회 북한선교위원회위원, 서울평협 상임위원, 신당동본당 사목위원회 교육분과위원장 등을 역임한 양 회장이 유일하게 맡은 회장직함은 한국교회사연구소후원회 초대 회장이다.
지난6월 종로성당에서「민족 통일과 한국천주교회」강의도중 고혈압으로 쓰러진 후 건강이 좋지않은 가운데서도 양 회장은 자서전적 신앙수기와 함께「신도신학」집필을 준비 중에 있다.
양 회장은 시인 홍윤숙(데레사) 씨와의 사이에 1남3녀를 두고 있으며 1962년이래 줄곧 장충동에서 거주하고 있다.
◆연보
▲1921년 7월 9일 황해도 봉산군 서종면 추진리에서 출생、심상소학교、제2고보 (경복고교)、경성사범대학 (서울대사범대) 중퇴
▲1940년 일제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2년간 부산형무소에서 징역살이
▲1945년 해방후 조선공산당 서울시 용산마포당부 선전부책
▲1949년 조선노동당 서울시당 부위원장으로「9월 폭동혁명」의 총책
▲1949년 9월20일 서울시당 간부회의에서 집단전향
▲1950년 치안국 경감
▲1951년 태양신문사 발행ㆍ편집ㆍ인쇄인
▲1953년 세계통신사 부사장、국가보안법 위반과 대남간첩단 사건 연루혐의로 무기징역ㆍ집행유예
▲1958년 평화신문사 부사장
▲1962년 대한증권협회 부회장
▲1971년 가톨릭출판사 부사장
▲1972년부터 현재까지 크리스찬 사상연구소 소장
▨저서
▲제3세력의 본질론 (1968ㆍ9 박문각)
▲복음과 사회와 교회 (1974ㆍ3가톨릭출판사)
▲신도론 (1982ㆍ4 가톨릭출판사)
▲2백주년을 생각한다 (1984ㆍ5 바오로출판사)
▲교회와 공산주의 (1987ㆍ8 가톨릭출판사)
▲민족통일과 한국천주교회 (1990ㆍ3 일선기획)
▲조국은 하나였다? (1990ㆍ7 일선기획)
▲신도-하찮은 존재인가 (1990ㆍ8 일선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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