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위령성월이다. 위령성월은 일차적으로 우리보다 먼저 이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자비하신 하느님께 기도와 보속을 드리는 엄숙한 달이며、이차적으로는 언제고 한번은 죽게될 우리 자신들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하느님께서 의로운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 영원한 세상을 동경해보는 거룩한 달이기도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뜻이있는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알아내기 위하여 많은 연구와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래서 얻은 결론들은 관점에 따라, 어떤 사람들은 인간을「사회적인 동물」이나「만물의 영장」또는「이성적인 존재」라고 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피조물」「유한한 존재」또는「행복을 추구하는 존재」로 표현했는가 하면, 심하게는「신비스러운 존재」나「불가사의한 존재」라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절박한 표현으로 인간을「죽음에로의 존재」로 규정하기도 하였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한번은 죽는다. 이제까지 죽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불로초ㆍ불사약을 구하던 진시황도 죽었고 천하를 지배하던 영웅호걸들도 다 죽어갔다. (비록 현대의학의 발달과 경제성장으로 인해 인간의 수명이 다소 연장되었다고는 하나 죽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수없이 많은 죽음들을 목격한다. 병사의 죽음、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거룩한 수도자의 죽음, 사고로 인한 비참한 죽음, 여생을 다 마친 노인의 편안한 죽음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죽음을 보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하나의 문제가 있으니 우리 주위의 사람들처럼 언젠가는 나도 죽을 몸이지만 죽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죽음에 대한 태도로 볼 수 있는데 우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인정하면서도「내가 죽는다」라고는 생각하지도 않거니와 아예 생각하기를 싫어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죽음은 두렵고 공포의 대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 일에만 몰두하고 골몰하여 인생 설계만을 해 나가다가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 주 예수님께서는「어리석은 자」라고 책망하셨다. (루가12、13~21 참조)
19세기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어느 시대보다도 구체적인 삶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로서 생철학과 실존철학이라는 거창한 말이 나오게 되었는데, 내용인즉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을 문제삼기보다는 삶의 현장에 처해있는 개별적이며 구체적인 인간을 문제 삼으며「지금」그리고「여기」이 상황 속에 처해있는 나 자신을 문제 삼는 것이다. 이를 죽음과 연관시켜 본다면「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식 형식논리학적 진술보다는「나는 죽는다」라는 절박한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여기에 관해 현대인들에게 건전한 생각거리를 제공한 사상가가 있었으니 그는 마르틴 하이덱거 (+1976년) 였다. 그는「존재와 시간」이라는 책에서 인간을「죽음에로의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인간은 자기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이 세상에 던져진채 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과 주위 사물로부터 초월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를 계획하고 본래적인 자아를 실현하면서 실존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려 하지만 일상 생활 속에서 참다운 자기를 잃어버리고 보통 일반적인 대중 속에서 평균적 대중으로 살아감으로써 비본래적인 존재로 타락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즉 사람들이 죽는 것이지「나는 죽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죽음의 가능성이「아직 아니」라고 여기고 만다. 그러나 이 상태를 벗어나 본래의 진정한 자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죽음」의 가능성을「벌써 이미」로 받아들이면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이 양심의 소리는 대중 속에 파묻힌「본래의 자아」가 진정한 자기로 돌아가기를 요구하는 침묵의 소리이다. 이러한 상태는「죽음에로 미리 달려감」이며 죽음의 가능성을 막연한 미래로 연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재가 될 수 있는 지속적인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철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는 하이덱거가 인간의 본질을「죽음에로의 존재」로 규정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하겠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 6) 이신 주 예수님 안에서 해결되어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가르치기를 죽음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에게 순종하지 않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의 벌로 온 것이다. (창세기3장). 사도 성 바오로는「죽음의 독침은 죄」 (I고린15,56) 라고 규정하며 그 결과로 인간은 죄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죄는 죽음과 직결된 강한 힘으로 인류를 구속시켜 온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 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 들였다』(로마5,12).
하지만 인류를 죄와 죽음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승리자 (I고린 15,57) 와 해방자 (로마8,2) 가 되셨기 때문에 그분을 구세주로 믿고 고백하며 따르는 자는 부활과 생명이신 그분 자신의 말씀대로『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 것이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11,25~26). 그러므로 교회는 위령 미사의 감사송에서 다음과 같이 장엄하게 기도하는 것이다.『주를 믿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오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오니, 세상에서 깃들이던 이 집을 떠난 다음에는 천국에서 영원한 거처가 마련되리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죽음도 지상 생명의 종결이기는 하나 인생의 영원한 가치와 운명을 결정짓는 절정이며 극치요 본 고향에 이르는 관문이며 영원한 당신과의 만남인 지복직관의 시작인 것이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주님의 제자답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25、34) 는 주님의 말씀처럼 기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나 못된 짓을 일삼거나 이기적이며 이 세상 쾌락에 빠져 함부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부끄럽고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엄숙하고 거룩한 이 위령성월에 각자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생활을 정리하고 새롭게 출발해야 할 것이다.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며 이웃사람들, 특별히 불우하고 버림받고 사회로부터 소외당한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제자다운 삶을 성실히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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