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과 사인방(四人幇)시대 흑과백、옳고 그름이 섞바뀌었다
태양이 먹구름에 휩싸이던 나날 하늘은 침착하고 땅은 컴컴했다
빛은 어둠과 어둠이 밝았다
그때에 몽둥이와 칼들이 질풍처럼
쇄도하여 교회의 빛을 덮쳤다
그때에 음흉한 밤이 그물을 펼쳤고
어느새 신도들은 함정속에 묶였다
순식간에 평야에서 산지까지
해안에서 변경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를 받드는 교회라곤 없었다
순식간에 도시에 농촌까지
들판에서 산골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표지 십자가라곤 아니보였다
제대는 사라지고 지성소는 닫히고
진리의 복음은 막혀 버렸다
목자들은 크거나 작거나
체포되고 피살되고 투옥되고 추방되었다
양들은 수천명씩 떼지어
박해와 감시와 강제노동을 겪었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참지 못했다.
비열이 정직을 심판대로 보내고
거짓이 참을 원수로 노려보고
어둠이 빛을 쳐서 없애버렸다
느닷없이 그들이 (홍위병이) 왔다!
겁도없이 헌법에 실려왔다
사나운 짐승처럼 달려와서
흰 눈을 짓밟아 검은 자국을 남겼다.
늑대처럼 일격에 양들을 죽였다
10년간 거대한 땅덩어리 중국을 강타한 태풍-문화혁명-의시기, 한 신자가 지은 기념가(紀念歌)는 당시 중국교회의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66년부터 76년까지 10년간 이어진「문화대혁명」을 거치고난 후 중국의 교회는 사실상 말살되었다. 무지하고 또 무지한 대 탄압이 휩쓸고 지나간 중국대륙에서 종교는 표면적으로 죽고 묻혀버린 것이다.
1949년「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후 이미 시련의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던 중국의 교회, 숨통을 죄는 불리한 여건 속에서도 면면히 이어져오던 중국의 교회는 문화혁명을 통해 철저히 짓밟혀 버렸다. 이른바「중국천주교애국회」라는 그늘하에 있던 교회조차 이 문화혁명의 폭풍우를 피할 수는 없었다.
수많은 이들이 두들겨 맞아죽기도 했다.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강제노역장에서 거름을 나르고 언땅을 파는 혹독한 노역 속에 죽어가기도 했다.
1990년 7월 중국 북경남당(南堂)에서 주일미사에 참례한 중국 신자들의 모습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실로 감개무량한 사건이었다. 주교좌답게 꽤나 규모가 커보이는 남당의 주일미사에는 신자들로 성황을 이루고 있었고 삐그덕거리는 계단위 2층에는 20여명이 성가대가 라띤어성가를 부르고 있었다.
미사 중임에도 불구하고 대개가 할머니들인 신자들이 묵주의 기도를「별도로」바치는 풍경은 퍽이나 눈에 익은 장면이라 반갑기조차 했다. 불과 20여년 전 우리의 자화상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사후 성당마당에서 만남의 시간을 갖는 모습 역시 우리와 다를바 없었다.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담소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은 변화의 물줄기속에 함께 흘러가는 중국의 현주소가 분명했다.
남당에서 둘러본 성물판매소는 숨길수 없는 중국의 현실 그대로인듯 했다. 몇 권의 빛바랜 책들, 수를 헤아릴 정도의 묵주와 패, 그리고 상본들…기념으로 선물하고 싶을 정도의 성물은 결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변화의 첫단계에 머물러 있는 중국, 그리고 그 체제의 통제하에 있는 교회의「솔직한 얼굴」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우리 일행이 북당에서의 미사와 성 김대건 신부, 이승훈 등의 동상건립문제를 북경의 부철산 주교 등 실력자들과 논의하고 있는동안 성당사무실을 찾았다. 비좁은 사무실에는 칠순을 바라보는 노인 한분이 두리번거리는 기자를 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낡아빠진 책상과 의자, 그리고 칠이 벗겨진 철제서류함 사무실은 철저히 소박했다.
남당은 모택동 생시인 1971년 중국에서 문을 열었던 첫번째 성당이었다. 외교관과 외국인 손님들을 위한 이 개방은 79년에야 비로소 그 폭이 넓어졌고 다소 활기에 차 있는듯한 남당의 분위기는 개방의 선두에 섰던 성당으로서의 위치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남당에서 자동차로 15분 거리에 있는 북당(北堂)의 분위기도 기대이상으로 활기가 있어보였다. 노인들이 대다수인 신자층, 성당입구에 자리한 화려한 성모동상, 초라한 성물판매 소는 남당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있었다.
우리 교회와 역사적으로 특별한 관계가 있는 북당은 1951년 성당 정면에 붉은별이 나붙고 성당의 각 기둥마다 대자보가 난무하기 시작하면서 폐쇄되고 말았다. 「모택동만세」「공산주의만세」「그리스도교인이여 단결하라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자」성인들의 초상이 대신 걸리게 됐음은 물론이었다.
학교로 변신했던 북당은 다시「창고」신세로 몰락한 채 20여년을 잠자야했다.
85년 12월 북당은 신자들에게 되돌아왔다. 굴욕과 아픔의 과거를 딛고 다시금 본역의 모습으로 단장하기 시작한 북당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맞은 셈이었다.
새로운 (개방의) 시대의 교회로 변신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국 여러 곳의 교회를 방문하면서 느낀 공통점이었다. 중국의 고도(古都)「서안」의 서안천주교회,「광주」의 성심대성당「장춘」의 장춘천주교회, 연길천주교회 그리고 여러 공소들 속에서 고난의 시기를 벗어난 교회로서 미래를 준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아직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다는 자신감은 없는 듯 했지만)
결코 되돌릴수 없는 듯한 변화의 물줄기를 타고앉아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 중국 속에서 중국의 교회, 그 미래를 짚어보는 것은 상당히 어렵고 난해한 일에 속한다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어제의 중국、중국교회를 이해하는 토대 위에서만이 가능한 일이기도하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중국의 공산화혁명이 성공한 이후 이른바「3자 (三自) 운동」이 시작되었고 9년만에 중국교회는 완전히 국가의 통제하에 들어가고 만다.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自養) ▲복음을 중국인 자신의 힘으로만 전파하며 (自傳)▲중국교회는 자율적으로 다스린다 (自治)는「3자운동」을 통해 공산정부는 교회를 당의 감시 속에 묶어두었다. 그것은 곧 중국교회와 전체교회를 좌절시키고자하는 당의 정책이기도했다.
1957년「중국천주교회 애국회」가 탄생된데 이어 58년 4월 교황청의 승인을 받지않은 주교가 탄생되기에 이른다. 당시 교황 삐오 12세는 두차례에 걸친 회칙을 반포,「애국회」「3자운동」「주교의 불법선출」을 단죄하였고 교황청과 중국교회의 관계는 악화될 수 밖에 없었다.
58년 이후 거의 모든「비애국자」사제들과 수녀들은 감옥이나 수용소에 갇혀 생산적 노동과 학대에 시달려야 했다. 66년 시작된 문화혁명으로 중국의 교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된다. 당과 국가에 협력해온 애국회라고 문화혁명의 무자비한 바람을 피할수 없었다.
10년 문화혁명기간 중 중국의 천주교회는 철저히 파괴되고 황폐화되고 말았다. 76년 모택동이 죽고 문화혁명은 막을 내렸다. 고난과 피흘림의 세월동안 죽고 묻혔던 교회ㆍ그리스도인들은 생명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교회의 문은 열렸다. 공장ㆍ학교ㆍ숙소로 탈바꿈되었던 교회가 교회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교회의 개방은 애국회의 재건과 더불어 이루어졌고 애국회의 관장하에 교회의 활동은 재개되었다.
현재 중국에서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고백하는 것으로 사회생활에 있어 중대한 손해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지난 수십년동안 변화무쌍한 종교정책에 길들여진 신자들로서는 현재의 개방을 1백%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고 얘기한다.
오랜 세월동안 몸으로 겪었던 이 체험적 교훈을 잊어버리기엔 그 상처가 너무 깊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교회는 10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졌고 계속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무섭게 변화하고 있으면서도 중국의 교회를 여타 교회와 함께 놓을수 없는 것은 바로 국가 즉 애국회의 통제하에 교회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곧 로마교황청ㆍ교황과의 관계가 미해결로 남아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로마와의 공동유대가 없는 지역교회로서 중국교회는 완전한 의미에서 천주교회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미 알려진 사실처럼 바티깐은 애국회를 축으로하는 지상교회와 지하교회라는「중국교회의 두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국가의 비호와 지휘하에 있는 교회, 보편교회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수칙을 거부하고 하나의 독립교회를 주장하는 중국의 지상교회를 무조건 단죄할 수 없음은 바티깐이 고민하며 안고있는 현실이다. 이 같은 현실은 탄압과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목숨까지 바치고자했던 지하교회의 입장에서는 수용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하다.
중국을 보고난 사람이면, 중국교회를 살펴본 사람이라면 두개의 얼굴을 가진 중국교회, 그 미래를 내다보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을 수 밖에 없다.
두 얼굴의 중국교회를 하나로 만드는 일은 바티깐의 일이자 중국교회의 몫이다. 거기에는 전 세계교회의 기도가 마땅히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