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큼 의식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오늘의 현실을 위기상황으로 보고 있다. 위기는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포함한다. 오랜 군부독재와 파벌주의의 희생이 된 정치의 부재, 재벌공화국이 빚어내는 갖가지 경제부조리와 심각한 환경오염、물질만능주의와 이기주의에서 파생되는 인명경시와 전통적 윤리도덕의 실종 등이 연일 각종 매스컴의 주요 내용으로 등장하고 있다. 양심있는 시민들의 분노섞인 비판과 고발의 목소리도 끊일 사이 없이 들려온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희망의 싹이 이런 갈등과 부조리의 와중에서도 점차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반세기 가까운 민족분단의 비극을 청산해야 한다는 이론적 당위성을 구체적 현실로 바꾸기 위해 국민들은 서서히 구세대의 이념적 갈등을 청산하고 외세의 간섭을 보이고、인간과 자연을 보호하기 위한 생명운동과 과소비 추방운동이 서서히 국민정서에 자리잡혀 가고 있으며, 공정한 분배와 민주적 생활환경을 조성하려는 노동운동이 노사의 상호존중과 상호존립을 지향하고 있음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현실의 갈등과 부조리를 정확하게 보고 민중의 한복판에서 자라고 있는 희망의 싹을 육성하는 일에 무관심한 조직이나 제도는 도태되기 마련이다. 교회가 시대적 징표를 바로 읽어야 한다는 말은 구체적 현실이 지니고 있는 갈등과 희망을 올바로 파악한다는 뜻이다. 시대적 징표의 정확한 파악은 새로운 복음화로 우리를 초대한다. 본고에서는 구약의 새로운 복음화와 예수의 새로운 복음화를 살펴보면서 현대 교회의 새로운 복음화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구약성서의 저자들은 남북분단(기원전 722년)이나 유배(기원전 586년) 와 같은 민족적 비극을 체험하면서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이들 사건들을 통하여 과거를 반성하고 현재를 비판하며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시했다. 이러한 쇄신작업의 기틀이 된 것은 출애굽사건과 시나이광야에서의 하느님 체험이었다. 이 체험은 초기에는 구전으로 내려왔지만 후대에 오면서 문헌으로 굳혀졌는데 후자의 대표적인 예가 요시아왕의 종교개혁(기원전 622) 때 성전에서 발견된 신명기 법전이다. 유배의 쓰라린 체험을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삼은 이사야 예언자의 제자들도 출애굽의 거사를 이루신 하느님과 사랑의 계약에 충실하신 하느님을 새로운 복음화작업의 기반으로 삼았다. 자신의 잘못으로 합당한 자격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하느님은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예전의 편협한 국수주의적 선민사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더 이상 폐허가 된 성전에 계시지 않고 압제의 그늘에게 신음하는 당신 백성 한가운데 계신다. 선택은 더 이상 민족적 특권이 아니라 만민의 빛이 되기 위한 정의와 봉사의 사명이다. 왕국은 팔레스티나의 일정한 영토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 또는 우주만물로 확장될 것이며 임금이신 하느님은 자비와 사람으로 모든 이에게 선정을 베푸실 것이다. 하느님이 파견하시는 메시아와 목자는 고레스 대왕처럼 이방인들 가운데에서 나올 수 있다.
예루살렘은 이제 더이상 유태인들의 수도가 아니라 뭇 민족들이 함께 모여 만민의 주님이신 하느님께 보편적인 제사를 바칠 장소가 될 것이며,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땅은 이방인들에게도 분배될 것이다. 한마디로 절망과 폐허 한복판에서 이사야의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편협한 선민적 민족주의를 깨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억눌린 자들, 마음에 상처를 받은 자들, 포로들, 감옥에 갇힌 자들, 슬퍼하는 자들이 자유와 위로와 해방을 맛볼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이사61장 참조). 그러나 이들의 새로운 복음화작업을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선미의 전통을 보호하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또다시 경신례와 율법과 선민의식의 벽을 쌓기 시작한 느헤미야와 에즈라에 의해서 실종된다. 그러다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다시 채택되고 완전한 결실을 맺게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르침도 당시의 시대적 갈등과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따라서 그분을 이해하기 위해선 1세기 팔레스티나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갈등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당시의 종교적 부조리는 율법을 엘리트들의 구원을 위한 전유물로 삼은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와 예루살렘성전을 중심으로 막대한 부와 권세를 누렸던 사두가이들의 세속주의에 기원을 둔다. 예수께서는 율법주의의 희생물이 된 죄인들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람을 강조하시고 인본주의를 통하여 율법의 무거운 짐에서 인간을 행방시키시고자 노력하셨으며、위험을 무릅쓰고 성전을 기도의 집으로 정화시키셨다. 정치적으로는 막강한 군사비를 바탕으로 피지배자들의 저항을 침묵시키는데 성공했던 당시의 로마의 거짓 평화와 헤로데 일가의 폭력에 맞서서 겸손한 봉사를 강조하시고 제자들에게 폭력을 거부하도록 요청하셨으며 스스로 폭력의 희생물이 되심으로써 폭력의 본질을 고발하셨다. 경제적으로는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와 야합해 있던 부자들에게 재물의 위험성을 지적하시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자선을 강조하셨으며 스스로도 가난하게 사시면서 가난한 사람들의 벗이 되셨다. 사회적으로는 남녀의 성차별, 인종차별 지역차별에 맞서서 여성의 권리를 찾아주시고 (반이혼률) 이방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을 친절히 맞으셨으며 스스로 천대받는 갈릴레아 땅에 나시고 그곳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그곳을 복음선포의 출발지로 선택하셨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현실을 부정하고 광야에 은둔한 꿈란공동체처럼 제도적 부조리에 무관심하시지 않으셨다. 물론 예수께서는 어떤 구체적으로 지엽적인 제도의 모순을 시정하시는데 역점을 두시지는 않았다. 그분에게는 악인의 처벌과 부조리의 척결이라는 부정적 투쟁보다는「하느님 나라」와「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인간애」및「사랑의 두가지 중대한 계명」이라는 적극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의 실현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목숨을 걸고 선포하신 이 보편적 가치들이 필연적으로 당시의 갖가지 제도적 구조악과 충돌하게 된다. 당시의 사회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었던 사람들이 예수를 선동가요 위험인물로 파악하여 제거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어디에서 당신의 삶 전체를 바쳐 증언한 보편의 가치들을 끌어 내셨을까? 하느님 나라에 대한 그분의 가르침과 가난하고 소외된 예언자들에게 소급된다.
당신 선교활동의 청사진을 밝히신 나자렛 회당의 첫 설교는 이사야서(이사61, 12:58, 6)를 바탕으로 하고있다(4, 18-19). 하느님 나라는 장소적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권을 말한다. 곧 가난한 자, 포로, 소경, 억눌린 자들에게 하느님이 임금으로서 베푸는 선정을 말한다.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말씀의 육화로 이미 이 땅에서 시작되었고 점차 완성되어 가고 있는 나라이지 저승에서 또는 종말에 다가올 미래적 사건이 아니다. 예수의 복음화작업 안에는 성과 속、선민과 이방인, 세속의 역사와 구원의 역사에 대한 구별이 없다. 이것이 바로 육화 (肉化) 의 신비이다. 그 다음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맞이하는 인간의 자세로서 사랑의 이중계명(二重誡命)을 제시하시는데 이는 구약의 율법을 요약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께서는 구약성서의 핵심적인사상을 깊이 명상하고 그것을 당대의 정치ㆍ종교ㆍ경제ㆍ사회적상황 안에「복음」으로 정착시키셨다.
이사야 제자들과 나자렛 예수의 새로운 복음화는 현시의 외면이나 도피를 허락치 않는다. 오늘날 중산층 위주의 신주증가를 걱정하는 소리가 높다.
중산층이란 현실 안에서 기득권을 획득한 사람들을 말하는데 종교에 대한 이들의 관심과 열의가 다음 세상에서의 기득권도 획득해 놓고 보자는 이기적 심산에서 나온 것이라면 커다란 오해이다. 이런식의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십자가에 맨몸으로 달려 하느님 나라와 지극한 인간애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나자렛 예수의 제자는 아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정의가 정착되는 세상, 보다 인간다운 세상, 진리와 평화와 사랑이 꽃피는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놓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지 인간이 그것을 목표삼아 쟁취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우리 사회에 만연된 부조리에 교회가 등을 돌린다면 사회도 우리에게 등을 돌릴 것이다. 본당내의 수많은 심신단체들이 지향하는 궁극적 목표는 과연 무엇일까? 개인의 신심과 지역교회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것이라면 사회의 어느 친목단체와 무엇이 다른가? 예수성심ㆍ성모ㆍ성요셉ㆍ천사ㆍ성체ㆍ성령 등에 대한 갖가지 지엽적 신심들이 하느님과 영혼의 개별적이고 신비적인 체험만을 강조하면서 그늘진 현실에 기쁜소식 곧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전하는 일을 외면한다면 무슨 의미를 갖는 것일까? 우리는 이 시점에서 성서의 메시지를 바탕화와 예수의 복음화를 바탕으로 세상 앞에서의 교회의 존재 이유와 그 궁극적 사명을 새롭게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교회가 기복신앙을 조장하고 극도의 개인주의와 집단적 이기주의에 빠져서 천상 예루살렘만을 기리며 사회 안에 방벽을 치고 게토로 남아있는한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신 채 현실의 온갖 모순과 부조리에 희생당한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사람들 사이를 전전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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