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만물이 소생하는 새봄과 함께 주 그리스도의 부활대축일을 맞이하여 진심으로 축하하며,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 위에 가득하기를 빕니다.
인생의 참의미 가져와
이 세상의 모든 역사 속에서 예수의사건, 특히 그분의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닌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을 향해 달리던 모든 인생이 생명을 향하여 방향을 바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죽음이 아닌 생명, 그것도 평범한 생명이 아닌 하느님 안에 있는 생명을 향해 달리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물론 논리적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이 헛됨은 물론이요, 세상 모든 것이 헛됩니다.
부활이 없으면 인생과세상은 죽음과 멸망의 운명으로 끝나고 맙니다. 어떤 권세도, 부귀영화도, 지식도, 세상의 그 어느 것도 이 죽음에서 우리를 건져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세상은 결국 무의미와 부조리의 악순환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부활로써 죽음과 멸망, 무의미와 부조리로 끝나고 말 세상에 1백80도의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하느님이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외아들까지 보낸 세상은(요한 3, 16)멸망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죽음도 면할 수 없는 그런 불멸의 생명으로 구원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말했듯이 『역사의 완성이란 실로 온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사랑의 완성인 것입니다』부활은 정녕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의 계시자체이며, 때문에 부활은 우리의 믿음의 기초요, 핵심입니다. 모든 삶의 의미와 역사의 의미입니다.
부활이 지닌 또 하나의 큰 교훈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남으로 그분의 수난의 의미를 깊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동시에 예수님 그분이 누구신지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이전에 그들이 지닌 예수님은 자신들과 유다 나라를 정치적 예속에서 구해줄 정치적 메시아였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수난을 앞두시고 전날 저녁에 말할 수 없이 큰 고통을 지니신 채 그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아직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제자들 사이에서 누구를 높게 볼 것이냐는 문제로 옥신각신 한 것』(루가22, 24)이라든지, 또한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길을 가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리는 그분이야 말로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실 분이라고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루까 24, 21)라고 실망적인 토로를 한 데서 드러납니다.
부활은 신앙의 핵심
그들은 예수님이 당신능력으로 모든 적들을 물리치시고 세상에 해방과 평화를 가져오시어 그렇게 오래 군림하실 분이시기를 기대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이 수난을 겪고 십자가에 못 박힌다는 것은-세번씩이나 예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전혀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마태16, 21~23 참조)때문에 예수께서 미리 말씀하신 대로 수난을 실제로 겪을 때에 그들은 완전히 모든 희망과 기대를 잃고 절망에 빠졌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베드로는 굳은 충성약속에도 불구하고 스승을 세 번씩이나 배반하였고 다른 제자들 역시 모두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진실로 우리를 구해주시는 메시아, 당신의 상처로 우리의 상처를 낫게 하여주시고 당신이 우리 모두의 죄를 지시고 죽으심으로써의 그 죄와 죽음을 쳐 이기시고 우리를 그 죄와 죽음에서 건져주시는 메시아, 즉 『고난 받는 야훼의 종』(이사52, 13~15 기타참조)으로 깨닫게 된 것은 부활을 체험한 후였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복음사가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초로 하여 그 부활의 빛 속에서 그분의 생애를 쓰고 있는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들 역시 부활을 체험한 후에 오히려 힘차게 고난 받는 예수님을 구원과 생명의 주님으로 선포하고 있음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진실로 고난 받는 메시아를 이해하는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전에서 잘 나타났듯이 우리들 대부분은 후보들과 함께 대권(大權)을 잡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원을 잡기만 하면 그 권력이 우리나라의 인간화와 민주화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생각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특히 야당 후보들에게서-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하였고, 대권을 잡게 되면 새 나라에서 우리자신도 반드시 한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 상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중에 누구도 당시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는 역시 「고난 받는 메시아」임을 깨닫고 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자신을 비우고 자신을 겸손 되어 낮추고, 자신의 생명까지 겨레를 위하여 기꺼이 내놓는 바로 그런 참 인간이 우리 자신과 이 나라를 진정 구할 수 있는 메시아임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 진리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를 진정 인간다운 나라로 만들 수 있기 위해서는 대통령의 권력이나 정부의 힘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이들을 포함하여 우리 안에 남을 위하여 자신을 바칠 줄 아는 고난 받는 메시아가 많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뿐더러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 예수님을 통하여 이 고난 받는 메시아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민족뿐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한데 모으기 위하여 죽으셨습니다(요한11, 52). 그러시고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이렇게 서로 사랑하여라』고 하십니다. 인생과 세상이 참 생명으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전적인 자기희생을 수반한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고난 받는 메시아모습 참으로 깨달아야할 때
수난을 앞두신 예수님은 그 수난을 바라보시며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아끼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목숨을 보존하며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요한12, 24~25)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밀접한 상호관계를 잘 볼 수 있습니다. 수난 없는 부활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가 우리의 정치·경제·교육·문화·사회가치관등 한마디로 우리자신과 우리나라의 참된 삶, 인간의 존엄성을 다시 찾고 인간답게 살 수 있기를 절실히 바란다면, 또한 남북으로 갈라지고 지역 간ㆍ계층 간에도 갈라진 이 겨레를 사랑과 정의, 용서와 화해로 하나 되기를 진실히 원한다면 우리는 참으로 초대교회의 신자들과 같이 부활하신 주님의 빛, 그 은총과 사랑 속에 살아야 합니다(사도2, 43~47참조).
전적인 자기희생 절실
우리는 진정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과 그 정신으로 다시 나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분을 본받아 자기 비움, 자기희생의 길을 가야하고, 서로 가진 것을 나누며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그 참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은 특히 성체성사에서는 우리를 살리는 생명의 빵이 되셨습니다. 곧 먹히는 존재, 「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밥이 되신 예수님, 우리는 이분의 마음의 사랑과 겸손과 비움을 헤아릴 수 있습니까? 우리의 교육, 가치관, 사회관념 그 모든 것은 이와는 반대입니다. 절대로 남의 밥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치욕이요, 말할 수 없이 큰 자기비하요, 자신을 무(無)로 만드는 것이기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로 이 길을, 매일매일 그분을 기념하며 행하는 성찬례(미사성제)안에서 끊임없이 가고 계십니다. 그것은 고난 받는 메시아가 끝까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을 남김없이 바치는 사랑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이 예수님을 우리는 깊이 묵상하고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특히 1989년 세계 성체대회를 앞두고 우리들 각자와 한국교회가 이 예수를 본받아 이 사회 속에서 『고난 받는 메시아』가되어 십자가를 지며 밥이 되고 먹히는 존재가 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이 부서지고 쪼개져야 합니다. 그때 엠마오로 간 두 제자들이 그 빵의 나눔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었듯이 우리도 우리자신의 나눔 속에 그분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또한 하느님과 이웃을 위하여 마음의 빈자리를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언제나 이분들을 사랑으로 모실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우리 믿는 이 모두가 남을 위하여 마음의 빈자리를 마련할 때, 그것은 빈 무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케 하는 요인이었듯이 우리 마음의 빈자리도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가운데 현존하심을 알리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때 이 땅에는 부활의 새 생명이 진실로 싹트고 자랄 것입니다. 이 땅은 진정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고 미래는 희망의 빛으로 밝게 빛날 것입니다. 그리고 성체대회의 표어 그대로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이심이 온 세상 모든 이에게 여실히 드러날 것입니다.
1988년 부활절
천주교서울대교구장
추기경 김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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