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보는 창간61년을 맞아 79년 12월 3일부터 중남미 에콰도르에서 선교활동중인 사제들의 사목활동을 돕고 있는 광주대교구 출신 평신 김용숙(젬마)씨를 통해 에콰도르교회의 실태를 몇 차례에 연재, 애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김욕숙씨는 에콰도르「구와야 퀼」교구에 속해있는「살리트레」본당에서 학생들의 교리교육과 본 당에서 운영하는 약국, 인성회, 양장점, 여중학교 수업, 구내매점 등의 일에 참여하고 있다. 에콰도르는 남아메리카의 브라질(동쪽)콜롬비아(북쪽)페루(남쪽) 태평양(서쪽)사이에 끼어있는 한국정도의 면적(28,3651k㎤)인 조그마한 나라로 16세기 초에 스페인의 식민지로 되면서 그 영향을 많이 받아 주민 97%가 가톨릭 신자이다…. ○
필자
내가 프랑스를 떠나 적도의 나라 에콰도로에 도착한 것은 1979년 12월 3일 밤 10시였다. 비행기문을 나서는 순간 화끈한 열기와 함께 푹 끼치는 특이한 냄새 때문에 나는 비로소 낯선 나라에 왔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12월 3일이면 구라파는 겨울인데 하룻밤사이에 무더운 나라에 도착한 것이다. 이질감과 생소함을 느끼면서 트랩을 내려서니 요셉 나와 계셨다. 이분은 오지리인으로서 나보다 3년 먼저 이곳에 와서 사목을 하고 계셨다 구라파에서 단 한번 이분을 만났었지만 이분의 낯익은 얼굴을 대하자 낯선데서 오는 불안감이 사라졌다. 신부님이 몰고 온 차를 타고 40K㎝떨어진「살리트레」로 가는 도중 눈에 뜨이는 도로변의 집들은 꼭 어릴 때 시골에서 보던 닭장 같은 인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기에는 몇 달 동안 비가 계속 쏟아져 1년 중 반 정도는 땅이 물에 잠기기 때문에 짐들을 원두막 짓듯이 2㎞이상 높게 지었던 것이다. 본당에 도착해서 먼저 성당에 들어서자 감실 뒤 오색찬란한 색유리가 아니라 사람들의 성품이 정열적임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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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에콰도르에서 일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은 1947년 프랑스에 머물 때 마리아 하이센베르그씨(현재 마산교구 역성회관관장)를 만난 덕분이었다.
마리아씨를 통해서 동생 신부님이 에콰도르에서, 일하고 있는데 할일은 많고 일꾼이 없어서 고생이 심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누군가 가야한다는 생각이 내마음속에 강하게 있었다. 그즈음 나는 교회의 신비, 그중에서도 특히 교회의 보편성에 대해서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내가 왜 그 한사람의 누군가가 될 수 없느냐는 강한 내적 충동과는 달리 무능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을 볼 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주위 친구들과 선배들에게 나의 심정을 솔직히 털어놓고 충고를 청했다. 『하느님의 전능하심에 신뢰를 가지라』는 친구들의 격려에 용기를 얻어 에콰도르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즉시 수속을 시작하면서 스페인말 공부에 들어갔고 1년반 만에야 이곳에 오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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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리히야라는 교리교사 아가씨가 마을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나를 강변에 있는 자기 친척집에 데리고 갔다. 에콰도르의 고급과일이라면서 내놓은 망고를 한입 베어 물자 강하고 특이한 냄새가 나서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때 마침 앞에 보이는 강물에서 더위를 못이긴 돼지들이 목욕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모든 것이 낯설어 긴장된 상태였는데 그 모습을 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돼지우리에 가둬놓고 키우는 모습만 보다가 자유롭게 나돌아 다니는 것만 해도 이색적이었는데 미련하기는커녕 영리하게도 강변모래에 구덩이를 파놓고 물이 고이면 들어가 목욕하는 모습은 참 신기했다. 그 때 옆에 있던 리하야가『앞으로 저 물을 먹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농담이겠지』하는 내말에 리히야는『정말』이라고 대답했다. 맛없고 냄새나는 과일과 돼지가 목욕한 구정물을 먹어야하다니…나는 속으로 겁이 더럭 났다. 그러나 지금은 과일 중 망고를 제일 좋아하게 되었다.
하루는 밤에 자러 들어갔더니 도마뱀종류인 1㎥정도 되는 이구아나 한마리가 모기망 바깥쪽에 도사리고 있었다. 기겁을 하고 놀라 악을 썼다. 밑에서 사람이 올라와 보고는 웃으면서 해치지 않을 테니 안심하고 자라고 했다. 그제서야 나는 모기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구아나와 나란히 하룻밤을 지냈다.
그 뒤로도 이구아나는 종종 찾아와서 내 옆에서 자고 가곤 한다. 도마뱀치고는 덩치가 크지만 옆에 있어도 꼬리로 사람을 칠뿐 물지는 않는다.
처음 한 달 동안은 쉬면서 본당 제의실 일을 봐드리고 신부님을 따라 마을과 공소를 돌아다니며 상황을 살폈다. 신부님이 어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시고 리히야가 아이들에게 교리 가르치는 것을 지켜보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고 익혔다. 한 달이 지나자 신부님은 나에게『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스페인 말이 서투른지라 웃기만 했다. 신부님은 본당과 공소의 첫영성체 준비반 하나씩을 맡아 교리를 해보라고 하셨다. 여덟 살에서부터 열서너 살 되는 아이들 20여명이 한반이었다. 유아세례를 받았을 뿐 학교교육도 주일학교 교육도 못 받은 아이들이어서 교리지식은 전무한 상태였다. 서투른 스페인말로 교리를 하다보면 때때로 아이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날 때 뭔가 좀 알아듣는가 보다하고 위로를 삼으며 기뻐했고 멍청한 표정을 지을 때는 가슴이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저희들끼리 킥킥거리며 웃을 때는 영문을 모르는 채 나도 따라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의 엉터리스페인어 발음이 그들을 즐겁게 했던 모양이다. 예를 들면『이해하지 못했다』란 스페인말「노 엔디엔도」를「노 엔디안도」로 한다든지 마늘은「아호(Ajo)」이고 눈은「오후(Ojo)」인데 마늘을 잘 먹는다는 말 대신 눈을 잘 먹는다고 했던 것이다.
3개월의 교리공부를 마친 후 첫영성체 날이 왔다. 이날은 온통 마을의 축제였다. 만국기가 펄럭이고 갖가지 꽃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성당은 이 축제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이웃마을에서 불려온 중ㆍ창년 악사들이 행진곡을 연주하며 앞장서면 흰옷으로 단장한 여자아이들과 신사복을 차려입은 남자아이들 2백여명이 보무도 당당히 성당을 향해 행진한다. 가족 대부모 친지 마을사람들이 그 뒤를 따른다. 이 화려한 축제는 영성체 때 절정을 이루고 미사가 끝난 후 대부모 친지들과 함께 가정으로 돌아가 잔치를 벌이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나는 이 모든 준비의 와중에서 정신없이 뛰느라고 벙벙하고 멍할 뿐이었다. 그러나 98%가 신자인 나라에서 처음 겪은 이 축제는 가톨릭 국가의 분위기를 맛보게 해주었다.
본당의 행사가 온 마을의 축제가 되어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분위기가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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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성복 바느질이 터진 곳을 색깔도 맞지 않는 실로 서툴게 마구 얽어놓은 옷을 예사롭게 입고 다니는 것을 많이 보았다. 또 밤에 쌀쌀할 때 어린이들에게 입혀준 옷을 낮에 더워서 괴로워할 때도 벗겨 줄줄 모른다는 사실을 관찰하고 부인네들의 계몽이 시급함을 느꼈다. 본당신부님과 상의한 결과 부인네들을 접촉하면서 바느질과 뜨개질을 가르쳐 주기로 했다. 이런 일은 말이 능숙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우기동안 부인네들에게 보여줄 뜨개질 견본들을 준비하는 한편 교통수단이 없는 그곳사정을 생각해서 자전거를 배웠다. 줄기차게 비가내리는 4개월의 우기가 끝나자 나는 월부로 자전거를 한대사서 5일 동안 5개 마을을 돌면서 쉬운 뜨개질과 바느질을 가르쳐주고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본당에서 일했다. 이들과 사귀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밝은 모습과는 달리 많은 부인네들이 깊은 상처와 고통을 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합법적인 혼인을 치르지 않고 한 남자가 서너 명의 여자들을 거느리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에 대해서도 무책임하다. 올바른 교유과 책임의식, 가정의 중요성 등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 교육만이 이들의 삶을 근원적으로 해결해주는 실마리가 될 것 같다.
축제를 좋아하고 낙천적인 성격이라 자신들의 장래는 물론 자녀들의 장래도 염려하지 않는다. 한푼이 생기면 탈탈 털어 술 마시고 기분 내는 하루살이 같은 생활이 되풀이된다. 이런 문제점을 파악한 하이센베르크 신부님은 신용조합운동이 필요함을 느끼고 설립을 추진시켰다.
이 무렵 하이센베르그 신부님의 친구인 헤르베르트 로이트너 신부님이 오지리에서 에콰도르선교를 위해오셨다. 로이트너 신부님은 하이센베르그 신부님께 와서 휴가를 보낸 것이 인연이 되어 이곳사목을 결심했던 것이다. 이때로부터 하이센베르그 신부님은 본당 일을 로이트너 신부님께 많이 맡기고 자신은 신용조합 일에 더욱 정성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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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나는 첫 휴가를 얻어 한국에 나온 기회에 여러 곳에 도움을 청했다. 이때 모금한 돈을 하이센베르그 신부님께 맡겨두었었는데 신부님은 필요한 곳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돈을 소중히 여기시면서 내가 그 기금을 이용하여 뭔가 뜻있는 일을 시작하도록 기다리셨다.
나는 남자들에게 쉽게 버림을 받고 경제능력이 없어 다른 남자를 유혹하거나 식모살이를 하거나 두세 여자가 한 남자에게 매달려 불행하게 사는 것을 보고 이런 여자들의 자립을 위해 양장점을 차리기로 했다. 한국에서 모금한 돈으로 3명의 부인을 데리고 내 자취방에서 문을 연 양장점은 곧 학교교실 2칸을 빌어 9사람이 일하는 큰 양장점으로 발전했다. 여러 가지 옷뿐만 아니라 첫영성체 복 케텐 모기장 침대시트 등 무엇이든 주문에 응했다.
그중 한 여자는 세 남자로부터 차례로 버림받아 아버지 다른 자녀 아홉을 거느린 사람이었다.
이 여자는 솜씨조차 서툴러 모기장이나 침대시트를 박는 단순한 일밖에 할 수 없었다. 양장점에서 나오는 적은 보수로 생활을 꾸려나가면서 돼지를 길러 아홉 자녀 중 둘은 고등학교까지 공부시킬 수 있었다. 지금까지 양장점에서 일하고 있으나 솜씨는 조금도 늘지 않았다. 그러나 성품이 꾸준해서 옷감구입이라든지 전체적인 일을 보살피는 믿음직한 일꾼이 되었다. 이 여인은 나를 보면 나이로는 딸 같지만 어머니 같은 은인이라면서 고마워한다. 양장점에서 일하면서 여자들은 규칙적인 생활, 시간을 이용하는 방법, 협조하는 정신, 함께 일하는 기쁨을 체험하게 된다. 남편들도 아내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재단사 아줌마도 남편에게 버림받고 세 딸을 둔 여자인데 다른 남자들의 유혹을 과감히 뿌리치고 꿋꿋하게 세 딸을 키우면서 지금까지 6년의 세월을 한결같이 일해 오고 있다.
이곳에 시급한 것은 식수문제였다. 주민들은 돼지들이 목욕하고 오물도 버리고 자신들도 더우면 목욕하고 빨래하는 강물을 끊이지도 않고 식수로 사용하는 실정이었다. 강물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들은 이 더러운 강물조차도 돈을 주고 사먹어야 한다. 이런 비위생적인 생활 때문에 유아사망률이 전체사망률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높으며 기생충보유자가 많고 각종피부병, 결핵, 장티푸스환자가 쉽게 발생한다. 이 오염된 물속에서 부인네들이 목욕을 하기 때문에 부인병에도 잘 걸린다. 그래서 많은 일을 벌여놓고 제대로 감당을 못하면서도 실정이 딱하여 간이진료소를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환자들이 약 한 가지도 못써보고 의사에게 진찰한번 받아보지 못한 채 딱딱한 대나무위에 시체처럼 누워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처참한 모습들을 청했다. 여러 가지 많은 약품원조를 받았으나 기생충과 결핵이 퇴치된 구라파에서는 구총제와 결핵약을 만들지 않기 때문에 구할 수가 없었다. 에콰도르 의사 한분이 적은 보수를 받고 진료소에서 봉사하고 있으며 약은 무료로 제공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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