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호에는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현황을 소개한다. 폴란드에서는 가톨릭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논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국민생활 속에 신앙이 깊게 뿌리박고 있다. 이러한 가톨릭이 공산주의 치하에서 어떻게 걸어왔는지를 그동안 발생한 역사적인 사건과 정치권력과의 관계 속에서 조명해본다. 국내일간지 외신면과 NC통신, 시사주간지인 「뉴스위크」지 및「타임」지와 국내학자들이 저술 번역한 각종논문ㆍ저작들을 참고로 했다.
3천7백만 인구 중 94%인 약 3천 5백만명의 가톨릭신자와 2만여명의 신부 및 2만5천여명의 수도자, 8천개가 넘는 본당이 있는 폴란드교회.
공산정권으로부터 공적(公敵) 제1호로 규정돼 온갖 박해를 받아왔으나 폴란드 가톨릭교회는 굳건히 서있다.
탄압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기간 중 사제수는 1945년에 비해 2배로 늘어났으며 국민의 정신적인 지주로서의 교회역할은 훨씬 강화됐다. 또 전세계 9억의 가톨릭신자의 지도자이며 세계 각국의 정책수림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교황도 폴란드출신이며 이 기간 중 성좌에 앉았다. 특히 서구교회와는 달리 노동자들의 독실한 신앙심은 오늘날 폴란드교회의 원동력이 되고 있다.
적어도 공산주의국가에서 신앙을 이토록 견실하게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동구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교회와 국민이 혼연일체가 돼 순교를 불사하고 신앙을 지킬 결의를 갖고 또 실제행동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공산정권도 처음에는 무작정 탄압에 나섰으나 대다수의 국민이 경건한 신자인 점과 파란 많은 역사 속에서 교회가 국민과 동고동락을 함께해 온 탓으로 국민들로부터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 그리고 교회의 의연한 태도 등으로 인해 가톨릭교회와의 정면대결은 피하고 있다. 다만 우회적인 방법으로 탄압을 계속하고 있는 형편이며 이런 점에서 교회와 국가 간에는「공존관계」가 모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운의 역사를 가진 나라
이지구상에 폴란드처럼 비운의 역사로 점철된 나라도 많지 않다.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사이에 끼어있어 항상 국제정치에 휘말려 희생되어왔으며 수차례에 걸쳐 오랫동안 나라 없는 설움을 국민들은 겪어야했다. 이점에서 한(韓)민족과 매우 유사하다고 보겠다.
18C말엽부터「폴란드의 비극」은 시작됐다. 러시아ㆍ프로이센ㆍ오스트리아의 세 강국에 의해 폴란드는 1793년의2차, 1795년의3차분할로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지도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1919년 베르사이유조약으로 1백20년만에 조국해방의 기쁨을 누렸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이 폴란드에는 6백만 국민의 희생(유대인 3백만명 포함)과 절반이상의 각종시설을 파괴시켰고, 또 그것은 소련의 동유럽적화를 야기 시켰다는 점에서 폴란드인에게는 더욱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대다수 경건한 천주교신자인 폴란드국민들은 또 다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지배하에 신음하게 됐다.
폴란드국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민족적 투혼은 참으로 대단하다.
제2차 대전 중 나치독일에 의해 6백만 국민이 희생되면서도 곳곳에서 자그마치 50만명의 레스땅스 전사들이 나치에 대해 항쟁했다. 특히 전쟁말기인 1944년 8월 이른바「바르샤바 봉기」때는 나치점령군과 민병대로 구성된 폴란드 국민군사이의 대접전으로 24만명이 한꺼번에 희생당하는 참상을 겪기도 했다.
공산화 된 후 1945년 연합정부가 1925년 이래 바티칸과 바르샤바정부간 맺어온 정교협정을 일반적으로 파기하면서 박해의 막이 올랐다.
이후 교회의 지도층인사들을 제포하고 학교에서의 종교교육을 폐지시키며 언론 등을 이용한 각종 반교회운동을 서슴지 않았다.
교회ㆍ정부 종교협정 체결
이에 대해 1949년 폴란드 수석대주교로 임명된 비진스키(stefan WvszvnsKi) 대주교는 정부의 종교탄압을 완화시킬 목적으로 정부와 협상을 시작하고 1950년 4월 국가와 교회간 종교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성직자는 공산정권에 반대하지 않아야 하며 특히 반체제활동에는 관여하지 말아야하고, 이에 대해 정부도 미사집전 등 종교의식의 자유와 학교에서의 종교교육 허용 및 가톨릭계 신문탄압 금지 등 일련의 종교자유를 허용하는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이 같은 공산정권과 교회와의「상호양보협정」은 폴란드뿐 아니라 체코나 헝가리 기타 동구권국가들에 있어서도 다소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편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협정으로 교회의 환심을 어느 정도 사고, 신자들의 반발이 다소 무마됐다고 생각한 정부는 1953년 비진스키 추기경을 비밀리에 체포하고 다른 성직자들도 연이어 체포하는 등 교회를 일시 위기로 몰아넣었다.
이때 교회로서는 다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1956년 그동안의 공산정권의 경제정책실패 등에 기인한 대규모 노동자폭동이 일어나 국민들도 이에 가세할 기세를 보여 오하브가 이끄는 공산정권은 위기에 직면케 됐던 것이다.
소련은 폴란드의 사회주의체제의 이탈을 염려, 폴란드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민족적 색채가 강하고 반스탈린 주의자라는 이유로 수감돼 있던 고물카가 석방돼 다시 정권을 잡고 위기국면을 풀어나갈 책무를 지게 됐다.
고물카는 사회를 안정시키고 소련의 개입을 막기 위해 그동안 수도원에 연금돼있던 비진스키 추기경을 석방하고 교회에게 국민적은 백만 원군을 얻은 느낌을 가졌고, 반대로 정부와 소련은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는 등 종교의 자유와 일련의 자유화를 둘러싸고 새로운 차원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느낌은 바로 현실로 나타났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즉위한 다음해인 1979년 6월2일부터 10일까지 8일간 조국 폴란드를 방문한 것이다. 교황이 모국을 방문했다 해서 당장 자유화가 이루어지는 등의 눈에 띄는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지만 크레믈린과 바르샤바는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일말의 위기의식을 가지기에 족했다.
폴란드국민에게 교황은 그야말로 영웅이요, 「구세주」였다. 첸스토호바, 바르샤바 등 교황이 가는 곳마다 수백만명의 군중들이모여 환호하고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그러나 교황은 모국방문 중 당국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발언은 피하고 화해의 분위기를 유도했다.
6월 9일 폴란드주교회의에서 행한 연설을 통해 교황은『가톨릭과 공산주의는 서로 반대되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와의 대화는 쉽지 않다』고 전제, 『그러나 이것은 개인의 행복을 위하여 간능하고 효과적이며, 국가는 이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교황은 공산당 서기장 기에레크에게 『교회의 임무는 인간으로 하여금 보다 신뢰감을 갖게 하고 보다 용감하게 하며, 사회적 책임을 강하게 하고 창조적이며 유용한 존재를 만드는 것』이라 설명하고『교회는 특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임무를 성취하는데 있어 필요한 것만 요구한다』며 교회와 공산주의와의 평화에 의한 공존관계의 가능성을 시사했다.
국민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에 따라 정부와의 직접적인 힘의 대결은 피했다. 하지만 교황의 조국방문은 폴란드인들에게 큰 희망을 남겨주었으며 그 후 경제사정의 악화와 정부의 실정으로 말미암아 자유화에로의 새로운「도화선」이 불붙고 있었다.
자유노조운동 시작
1980년 8월 18일 그다니스크항 레닌조선소 전기공으로 일하던 레흐 바웬사 (당시38세)를 중심으로 자유노조「솔리다리노스치」(連帶)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발단은 정부의 식료품가격을 대폭 인상한데 대한 반발로 시작되었으나 배경에는 정부의 국민 복지를 위한 경공업경제정책실패와 나아가 공산정권의 독재횡행과 국민의 자유화의 갈망이 드리워져 있어 이사건이야말로 폴란드 뿐 아니라 동구권의 역사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지방 관리의 직선 등을 요구하는 것은 이미 사회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선소노동자를 비롯 각 부문의 근로자들은 그다니스크 레닌조선소를 거점으로 8월 18일부터 파업과 시위에 나서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있었다. 바웬사를 지도자로 하는 자유노조측은 자유노조설립인정을 포함하는 21개항의 요구조건을 걸고 정부와 몇차례 협상을 벌인 끝에 8월 31일 레닌조선소에서 정부로부터 많은 양보를 얻어낸 끝에 일단 협상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이후부터 폴란드는 새로운 역사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한편 파업 중 노동자들은 야외에서 옥외미사를 봉헌하고 교회도 음양으로 이들을 지지한 것은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폴란드교회를 잘 나타내 준다.
그러나 민중의 끊임없는 파업과 시위로 사회가 혼란해지자 이번에도 소련의 군사개입가능성이 점증하게 됐다. 소련의 입장에서 볼 때 폴란드가 탈사회주의화로 되면 동구전체에 파급효과가 미쳐「소련 불록」은 와해될 위험이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태를 간파한 군부는 무능한 당을 제치고 정치일선에 등장했다. 마침내 반짝하던「자유의 봄」은 1981년 12월 13일 야루젤스키가 이끄는 군사평의회에 의한 계엄령선포로 막을 내리게 됐다. 야루젤스키 정권은 바웬사를 포함한 자유노조지도자, 지식인, 종교인등 3만 여명을 투옥하고 각 방면에 걸쳐 탄압을 가하는 한편 경제개혁 등을 단행, 「사회주의 체제」를 지키는데 일단 성공했다.
그러나 그 후 불법화된 자유노조는 지하에서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교회도 정부와 국민간의 화해를 주선하면서도 공공연히 자유노조의 부활을 주장하며 정부와 맞서고 있다.
심지어 자유노조를 강력히 지지 옹호한 포피엘 루스코 신부 같은 성직자는 경찰관에 의해 남치, 살해되기도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폴란드의 이러한 혼란을 우려, 83년 2차 모국방문에 나섰다. 첫 번째 모국방문 때만큼의 종교적인 효과는 얻지 못했으나 폴란드국민들을 위무하는 한편 정부의 교회탄압과 인권유린에 제동을 거는 부수적인 효과는 적지 않게 얻었다.
교황은 방문 때 강론을 통해 자유노조의 부활을 촉구했으며 많은 정치적인 자유허용을 정부에 요구했다.
성청과 외교관계 체결될 듯
86년 방문 때 야루스킬수상에게 외교관계수립을 희망했으며 성청과 폴란드정부는 그 후 외교관계수립을 향해 한발 짝씩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최근 보도된 외신에 의하면 올해 안으로 바티칸과 폴란드와의 관계 정상화가 이루어질 전망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지난 3월 18일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한 끝에 유고수상과 동동성명서「신베오그라드선언」을 채택하고 지난 40년간 동유럽에 대해 고수해 온「제한주권론」을 철회한다는 기획적인 발표를 했다. 이 선언은 한마디로 소련은 더 이상 동구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소련의 이 같은 태도는 고르바초프의 새 정책인 글라스노스트(대외개방) 및 페레스트로이카(경제개혁)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자국경제건설이 더 급하다는 이야기다.
공산화초기부터 유고는 티토대통령의 지도로 일찍 독자노선을 택했으며, 체코의 프라하의 봄, 폴란드의 수차례 자유화 운동 등 오래전부터 동구국가들은 탈소의 몸부림을 쳐왔다. 이들 국가는 소련의 대외개방정책에 앞서 서구와의 문호를 개방하고 있었다.
소련으로서는 이러한 동구의 입장을 추인내지 수용하지 않을 수없는 상황에 처했으며, 마침내 고답적인 이데올로기논쟁은 이제 접어두어야 한다는 판단아래 이번「신(新)베오그라드선언」을 하게 된 것으로 추축되고 있다.
바티칸과의 관계정상화와 소련의 불간섭, 폴란드정부와 국민의 자유화 및 개혁의지 등과 함께 개방화시태의 국제정세에 따라 폴란드에 자유화의 꽃이 활짝 피고, 교회도 더 자유롭게 되기를 자유세계사람들은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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