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이윤자 부국장
樹友 이창복 박사. 그는 학계가 공인하는, 아니 한국이 자랑하는「나무박사」다. 「나무박사」-그의 생애를 몇 마디의 단어로 압축해 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일생을 나무와 들풀연구에 바친 노교수에게 가장 친근하고 어울리는 칭호가 아닐 수 없다. 84년, 1년이 모자라는 40년 동안 줄곧 재직해온 서울대학교 농대를 정년퇴임,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그는「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그 특유의 집념과 의욕으로 새로운 출발을 선언, 후학들을 놀라게 했다. 오직 앞만을 보며 달려온 외길인생의 정점에서 그는「성서식물」의 명칭을 밝히는 것을 자신에게 맡겨진 새로운 사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樹本學」과「식물분류학」의 학문적 체계를 이루고 집대성시킨 그의 업적은 불모지 한국임업과 임학발전을 이끌어 새로운 경지를 이룩한 선구자적인 것으로 집약되고 있다.
결코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쉼 없는 연구 욕과 열의가 만들어낸 그의 학문적인열매는 한국수목학 및 식물분류학 연구에 뚜렷한 이정표를 기록되고 있다.
거짓을 모르는 수목의 세계,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한평생, 그의 정직한 삶의 자로 보는 세상은 참으로 혼탁하기만한 모양이다. 『요즘 어떤 사람들에겐 사람들이 모두 돈으로만 보이는 모양이야. 지나친 욕심, 분에 넘치는 욕망에 사로잡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용서 못할 짓들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요』최근 야기된 농약콩나물, 보면 가슴이 답답하다는 그는 욕심과 욕망만을 추구하는 이 세상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참으로 많다고 강조한다.
정직하고 우직한 사람이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인간 세상에 비해「심는 대로 거두는」땅의 정직성과 자연의 순박함을 피부 깊숙이 맛보며 살아온 그의 삶은 역시 강직하고 때론 우직스럽다는 평을 자주 듣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별로 인기도 없었던 시대에 발을 디딘 임학분야에서 그는 한눈 한번 팔지 않고 그의 길을 달려왔다.
「자연은 곧 파괴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온 무지의 세계 속에서 나무와 들풀 속에서 고군분투해온 그의 삶은 어쩌면 단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한국 수목도감」「악용 식물도감」「식용식물도감」「曺贄源 도감」그리고「대한 식물도감」등 한국수목세계를 집대성한 그의 대 저서들과 무수한 연구노문들은 그를 한국임학계의 거목이라는 요지부동의 자리에 올려놓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6ㆍ25전란 중 완전히 소실돼 제로상태에 있던 식물표본을 무려 10만점이나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하다.
이 박사가 나무와 친구가 된 것은 그의 고향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나무와 숲이 많기로 유명한 평남맹산을 고향으로 둔 그는 어린 시절 자연과 자연스럽게 친교를 맺게 된다. 보통학교 4학년시절 자연공부를 위해 급우들과 함께 들에 나갔던 그는 여기저기 흔하게 피어있는 들국화가 몇 개의 꽃으로 구성됐는지 찾아보라는 선생님의 숙제를 받게 된다.
급우들이 모두 자랑스럽게 숙제를 끝낸 뒤에도 그는 좀체로 선생님의 숙제를 끝낼 수가 없었다.
들국화마다 모두 다른 수의 꽃으로 꽃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아이들과 달리 세밀하고 주의 깊은 그의 관찰력과 끈기에 선생님은『너는 장차 이학박사가 되겠다』는 칭찬과 함께 그를 눈여겨 보게 된다. 「이학박사」는 곧 그의 별명이 되었고 그의 운명은 이미 이때 판가름이 난 셈이었다.
그는 상급학교 진학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만류를 무릅쓰고 평양사법학교를 지원했으나 시험에 낙방을 하고 만다.
『시험에 떨어지자 아버지는 오히려 좋아하셨지. 민족의식이 유달리 강했던 우리 아버지는 일본사람들이 운영하는 학교엔 보낼 수 없다며 학교가 없는 함경도 두메산골로 가족을 데리고 이사를 떠나신 적이 있었어요. 때문에 나는 6년간이나 서당공부를 하기도 했고』.
낙방 후 집에서 농사일에 매달린 그는 1년 후 당시농업학교 지원을 결심, 아버지 몰래 평양농업학교에 응시, 9대 1이라는 높은 경쟁 속에서도 당당히 합격을 한다. 다행히 좋은 선생님을 만나 식물에 대한 연구와 탐구에 재미를 더해간 그는 농업학교 5년간을 줄곧 톱으로 달려 수원농대에 무시험합격이라는 호기를 얻게 된다.
농업학교를 끝으로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고 국민학교 선생님이 되기로 한 아버지와의 약속 때문에 그는 아버지와 대결상태에 들어갔으나 그의 굳은 결심을 확인한 아버지는 결국 허락을 하고 만다.
『공부를 하면 높은 사람이 되고 높은 사람이 되면 일본인들의 앞잡이가 되기 쉽다는게 아버지의 생각이셨어. 몇 번 씩이나 일본인 앞잡이노릇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은 후에야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었지. 아버지가문대대로 내려오던「감투를 쓰지 말라」는 가훈을 지키려면 공부는 글자를 해득하는 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이셨지』
특출한 재주가 없는 한 감투를 쓰지 말라는 가훈은 감투의 덧없음을 뼈저리게 체험한 이 박사 집안의 시조(始祖)의 명에 따른 것. 그러나 식물연구 분야에 뚜렷한 이정표를 이룩한 업적으로 이 박사는 결코 그의 가훈을 어기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를 남긴 자랑스런 후손이 된 셈이다.
수원농대 졸업 후 평양모교에서 후배를 가르치던 그는 해방과 더불어 수원 모교로 불림을 받고 수목학 정립과 후배양성이라는 자신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민족의 비극 6ㆍ25는 그나마 있던 귀중한 수목자료와 표본들을 깡그리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그의 연구는 무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부산 피난시절 부두노동을 하며 모든 것을 포기하는 극한상황에 처하기도 한 이 박사는 정직한 사람이 살아남기 어려운 아픔을 6ㆍ25를 통해 너무나 절실한 경험으로 간직하게 된다. 『산으로, 들로, 이 나라 방방곡곡을 모조리 이 잡듯이 뒤졌어요. 한여름 빗속에서 모기에게 뜯겨 얼굴이 수수팔떡처럼 부어오른 일도 있었고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그러나 진귀한 나무, 새로운 들풀을 발견하는 기쁨에 비하면 그런 고통쯤 아무것도 아니었지요』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나무와 풀을 찾아 헤맨 그의 열정과 집념은 완전히 제로상태인 식물표본을 거의 혼자 힘으로「10만점」이란 반석위에 올려놓은 것을 비롯, 각종 식물도감을 집대성하는 결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관악산 수목원」도 그 결실중의 하나다. 71년 대통령령 566호로 정식 설치된 관악산수목원은 식물학 연구와 조사에 필요한 산 자료를 제공하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추구하는 산 교육장으로 현재 1천 7백여종의 식물을 보유, 최대수목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수목에 대한 그의 애착은 57년 미 하버드대 유학시절 미국 각 지역은 물론 미지의 열대식물을 찾기 위해 쿠바의 하바나까지 위험을 무릅쓴 원정을 강해하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동안 외국으로부터 받기만 하던 종자목록을 70년부터 외국으로 보내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였다.
『토요일과 방학이면 어김없이 배낭을 메고 나서다보면 몇날 며칠씩 산속을 헤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 씻지도 먹지도 못한 행색도 그렇고 수상하게(ㆍ)산속을 뒤지고 다니는 행동 때문에 공비로 오인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당시를 회상하며 웃음을 터트리는 이 박사는 관상 자원의 경제적가치가 높아지면서 수익만을 노린 나머지 자연자원의 파괴가 심각해지는 현실을 우려했다.
46년에 부인과 함께 입교, 신앙인의 길로 들어선 이 박사의 영세동기도 식물과 밀접한관계가 있다.
식물 분류학 연구에 필수적인 라틴어공부를 위해 당시 외국인신부에게 라틴어를 배웠던 이 박사는 46년 부친의 별세소식에 충격을 받고 아버지의 영혼을 위해, 또 자신의 구령을 위해 오랫동안 결심해온 영세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
『대학교주 10여명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면서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이셨던 심 신부는 한 번도 성당 나오라는 소리를 안 하더군. 이유를 물었더니 배운 사람이라면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것이라는 대답이었지』강요하지 않으면서도 모범적인 사제상으로 이 박사의 신심을 이끈 심신부의 영향 속에 자연스럽게 신앙에 임문한 그는 수원 복자성당을 지으면서 총회장이란「감두」를 쓰게 된다.
72년「투표」로 수원교구 평협 회장에 선출돼「좀 더 큰 감투」를 쓴 그는 73년 다시 전국 평협 회장이라는「아주 큰 감투」를 쓰면서 교회 내부에 깊숙이 발을 딛는다. 74년 지 주교 구속사건을 계기로 명동의 데모가 이어지면서 공무원의 신분인 이 박사의 고민은 시작된다.
「신발이 닳도록」교구를 순방하고 평신도들의 참여를 촉구하며 감투 쓴 몫을 해내며 애쓰던 그는 결국 74년 김기철씨에게 그 감투를 넘겨주었고 여의도 총회장을 끝으로 평범한 신앙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평협 총회장 할 때는 평신도 활동이 아주 미약했지. 각 교구마다 평신도 활동을 전개할 분위기도 성숙돼있지 못했고,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주교님 신부님들의 협조가 미약했던 것도 사실이예요』교회전체의 인식부족으로 미약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에 비해 오늘의 평신도 활동은 상당히 활성화되고 성숙된 것 같다고 지적하는 이 박사는 특히 성직자와 평신도간의 원할 한 협조체계가 보기 좋다고 평가하기도.
교회일선에서 물러난 지금.
교회에 대한 이박사의 불만은 조금 있는 편이다. 서로 자기의 역할을 넘어설 때 보기가 안 좋다는 이 박사는 교회가 다양한 계층의 집합체라는 사실을 인식, 모두를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교회는 어느 누구도 소외시켜서는 안 된다고 봐요. 교회에서 만은 소외그룹이 없어야 된다는 얘기지. 설사 공산당이라 할지라도 교회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속에 끌어들이기 위해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어요』84년 정년퇴임은 그에게 있어 학문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앞서 지적한대로 성서에 등장하는 일을 자신이 말아야할 사명으로 여기는 이 박사는 이를 위해 요즈음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 또 다른 열정 속에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있다. 칠순을 눈앞에 둔 그는 성서의 식물조사를 위해 내년쯤 성지 이스라엘로 직접 표본채집 조사를 떠날 예정이다.
오직 식물조사를 위해 3개월간의 일정을 잡고 있는 그에게 있어 성서식물 완성은 그의 남은 생을 장식할 최대의 작업이 될 것은 분명하다. 정년 후에 잠시 출강하던 일도 이제는 사양한 그는 현재「자생식물 동호회」라는 소박한 모임의 고문으로 변함없이 자연을 친구로 삼고 있다.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 40여명이 모여 구성된「자생식물 동호회」는 전국 산을 누비며 수목을 찾아 촬영, 연감에 수록하고 또 이를 전시하는 밑지는(?)사업을 하는 단체다.
이 모임을 통해 하루하루 없어져가는 지구상의 식물, 그 위기의 실태를 고발하고 그 위험을 경고하고자 하는 이박사의 또 하나의 꿈은 직접 종자를 길러 자연을 살리는데 구체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산에 가면 언제나 나 자신을 새롭게 돌아보게 됩니다. 자연의 신비 속에 하느님생각이 절로 나지요』일평생 걸어온 그의 길ㆍ학문의 길은 어쩌면 하느님과의 만남을 위한 신앙의 길로 통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연보>
▲1919년 6월 평남 맹산군 동면 대흥리 9번지에서 부친 이병준씨와 모친 김관보 여사의 장남으로 출생
▲41년 3월 평양공립농업학교 졸업
▲43년 9월 수원고등농립학교 입학과 졸업.
▲45년 11월 수원농립전문학교 조교수.
▲46년 10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전임강사.
▲54년 5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조교수.
▲57년 2월 하버드대학교 대학원에서 서사학위.
▲57년 9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부교수
▲61년 5월 서울대 농대 임학과장
▲61년 9월 서울대농대 교수
▲61년 12월 대학입학고사 전형위원
▲63년 2월 서울대학원에서 농학박사 학위
▲63년 6월 학술연구조성 심의위원
▲63년 12월 천주교 수원교구사목위원회 총회장
▲64년 1월 대학임학고사 출제위언
▲64년 3월 문공부 문화재위원
▲64년 5월 문교부 장학위원
▲64년 10월 천연보호구역 조사위원
▲64년 11월 한국FAO위원회 임학전문위원
▲65년 3월 과학기술 용어제정 심의위원
▲66년 4월 서울대 농대 건설위원
▲67년 3월 일본 東京大學 표본조사
▲68년 4월 과기처 과학기술상본상수상
▲69년 3월 미농립성에서 식물자원 개발에 대한 감사장 수여
▲69년 6월 천주교 수원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
▲72년 5월 한국문화재 보호협회 중앙지도위원
▲73년 11월 천주교 한국평신도사도직협의회회장
▲74년 4월 한국식물분류학회이사
▲74년 4월 프랑스ㆍ영국ㆍ독일ㆍ오리지ㆍ이태리ㆍ일본방문,표본연구및주목원자료수집
▲75년 10월 한국식물분류학회 회장(3대)
▲76년 10월 서울대 30주년근속상
▲78년 자연보호헌장 제정위원
▲82년 3월 문화재위원회 제3분과위원장
▲84년 8월 국민훈장모란장수상
▲84년 8월 서울대농대교수 정년퇴임
▨者쿰「한국수목도감」「약용식물도감」「식용식물도감」「曺資源감도」「대한식물도감」외 다수
▨식물자원ㆍ식물자원의 보존 등의 論說및 수목학과 식물분류학에 관한 학술논문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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