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생겨서 범죄는 늘어났지만 죄가 많은 곳에는 은총도 풍성하게 내렸습니다. 그래서 죄는 세상에 군림하여 죽음을 가져다주었지만 은총은 군림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얻게 하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로마 5,20~21)
죄의 결과와 하느님의 관대하심
하느님은 인간을 당신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에 초대하셨는데 인간은 이를 뿌리치고 생명이나 자유나 행복을 줄 수 없는 피조물에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들을 죽음의 상태에 버려두시지 않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신다.
1. 죄의 결과
이미 죄의 구별에서 보았듯이 죄의 본질은 생명이신 하느님을 거부하고 떠난 것으로 그 결과는 죽음이다. 하느님이 심판관이나 형리로 벌을 주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이는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생명의 관계가 단절된 영혼의 죽음이며 영원한 생명을 상실하는 것이다. (갈라5,19~21:I고린 6,9) 이런 죄를 짓는 자들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못한 것이다 (루가 17,1~2).
죄의 결과는 죽음과 하느님 나라의 상실이고 참된 평화와 행복을 잃는 고통이다. 이를 실고(失苦)와 각고(覺苦)로도 설명하였으며 지옥의 끝없는 고통으로, 지옥벌로 설명한다. 하느님을 완전히 거절한 것도 아니고 불완전하게 사랑한 행위를 경죄라고 하고 그 벌은 생명을 잃은 것은 아니나 육신의 건강에 비유해서 병고에 해당된다. 치유를 서두르지 않으면 죽을 병에 걸릴 수도 있다. 만일 누가 이와 같은 상태에서 죽으면 사죄(死罪) 의 상태에서는 구원의 희망이 없는 영벌에 떨어지고 경죄의 경우에는 정화의 과정인 잠벌을 받게 된다.
개신교에서는 영옥벌에 대하여 회의를 갖고 있지만 이는 합리적 교리이며 죄의 의미를 깊이 새기게 하는 것이다. 지옥벌에는 교파 간에 이의가 없는데 연옥벌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는 것은 성서에 없는 이야기이며 미신에 가깝다는 의혹에서 온다. 사람이 죽으면 결정적이고 시간을 벗어나는데 어떻게 한시적 벌이 가능하며 또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도가 유효한가 하는 의문이다. 그러나 가톨릭이 설명하는 연옥벌이란 인간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죽으니 천국에 들어가기는 부당하고 그렇다고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성서를 통해서 간접적 해답을 시도한 것이다. 성서의 계시는 인간을 위하여 인간에게 주어진 것으로 문화와 역사의 변천 안에서 상승적으로 나타난다. 이스라엘이나 교회는 오랜 역사동안 이 교리를 믿어왔고 소위 종교개혁 이전에도 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하여왔기 때문이다. (2마카12, 43~45참조) 인간의 행위는 정화를 거쳐야 한다. (I고린3, 12~15)
그러나 이 문제를 너무 죽은 사람 개인의 사후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고 죄의 연대성이나 인간의 사회성과 역사성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역사성과 사회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누구나 과거의 영향을 받았으며 미래에 영향을 끼친다. 자기가 태어나기 전부터의 죄의 힘과 영향을 받으며 (시편 51,7) 인간의 죄와 그 영향은 범죄행위와는 독립되어 사회와 역사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안다.
타인의 과거 잘못의 영향은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스스로 조절할 수 있으나 자신의 잘못된 행위와 그 여파는 죽은 후 타인에 의하지 않고는 수정되거나 정지되지 않는다.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선행이 바로 이러한 사회적이며 역사적 상황에 동참하는 것이라면 당연하고 또 장려해야 될 문제다. 그 뿐 아니라 신앙고백에서 우리는 성인들의 통공(通功)을 믿는다. 산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즉 세상 종말 전 시기에 사는 우리는 살아있거나 죽었거나 서로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 또 기도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역사의 심판에 대비하여 서로 은혜를 베풀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2. 하느님의 관대하심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고 잘한 사람은 상을 받아야 된다는 통념은 죄와 벌에 대하여도 같은 생각을 가진다. 다만 인간들이 그것을 현세 생활에 국한시키려는 유혹을 받는다. 이러한 문제는 욥기 (21,7~26), 예레미아 (12,1~3)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의인들의 고통은 왜 있으며 죄인들은 왜 벌을 받지 않는가? 정의로우신 하느님은 정말 계신가 하고 의심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다(지혜서,1,16~3,19). 생명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누구나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시지 벌 받아 죽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에제18、23:지혜11,21~12,22)
의인들의 고통은 하느님이 외롭지 않아서가 아니고 인간들이 불의하기 때문이며 죄인들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고통과 인내를 통해서 세상의 구원이 이루어짐을 알게 되었다 (이사야50,4~51,3:52,13~53,2:히브 4,14~5,10).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어버이같은 사랑으로 용서와 자비의 샘이다. 이는 인간적 사랑이 아니고 거룩한 사랑이다 (호세아11,9)
죄에서 해방
인간이 범죄하여 하느님의 은총과 생명을 잃었으니 자기의 책임이다. 그러나 마치 자살한 사람은 생명을 스스로 간직할 수 없듯이 영혼의 죽음을 선택한 죄인도 스스로 회개하여 생명을 얻을 수 없다. 자기의 자유 의지로 파괴한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는 없다. 이는 오로지 살아계신 하느님의 자비가 거두어주셔야만 가능하다. 그런데 하느님은 어떤 죄인도 일어날 힘을 주시며 인내롭게 기다려주신다. (마태9,12~13:루가15,1~32) 세상을 단죄하시지 않고 당신 외아드님까지 희생시키시어 구원으로 부르신다. (요한3,16~17) 그러므로 이는 새로운 탄생이며 (요한3,3~13) 새로운 창조이다. 죄에서 해방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고 무상(無償)의 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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